Sunday, June 13, 2010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글: 이용희 교수

많은 신앙인들이 주님을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성경은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 거룩함이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Make every effort to live in peace with all men and to be holy; without holiness no one will see the Lord.'(Heb 12:14 NIV).

우리말 성경에는 '이것'이 화평함과 거룩함을 표현하는 지시대명사로 보일 수도 있지만, 영어성경으로 보면 '이것'은 분명하게 'holiness'를 지칭한다. 즉, 거룩하지 못하면 주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음란을 버리고'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들에 따르면, 음란을 버리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거룩한 자는 주님을 본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고, 오직 한 가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만을(시 27:4) 원한다고 하는데, 거룩하지 못함으로 주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우리는 과연 거룩해질 수 있는가?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 5:14)

위 말씀같이, 우리의 거룩함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우리가 거룩을 구하면 주님은 반드시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거룩하지 못함은 거룩을 결단하고 주님께 구하지 아니한 우리에게 그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는가?
거룩의 대명사같이 지칭되는 다니엘을 벤치마킹한다면, 그는 적국의 포로로 끌려간 소년의 때에도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결단하고 물과 채식만을 먹기를 환관장에게 요청했다 (단 1:8). 예수님 닮기를 진정으로 사모한다고 일어나서 두 손 들고 눈물 흘리며 찬양을 부르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의 거룩을 옷입기 위하여 결단하고 대가를 치르며 합당하게 사는 자는 얼마나 되는가?

다니엘같이 생명을 걸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한 결단이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또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다(단 6:12). 그는 주님과의 교제를 생명보다 귀하게 생각했고 기도시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5)라고 말씀하고 있다. 거룩을 위한 결단과 함께, 날마다의 삶에서 생명을 드려 '말씀과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거룩한 삶의 핵심임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오늘도 거룩한 사람을 찾으신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2:20~21)

주님이 귀하게 쓰시는 그릇은 금, 은, 나무, 질그릇 등 그릇의 재질과는 상관없이 깨끗함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많은 질그릇과 나무 그릇들이 금 그릇이 되지 못해서 평생 열등감 가운데 방황하고 있다. 한국을 열등감 천국이라고 한다. 일류를 추구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일류가 아니면 인생 실패로 여기게 하는 일류병은 곧 마귀병이다. 나무 그릇과 질그릇을 별 볼일 없이 여긴다면 그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다섯 달란트 맡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을 때와, 두 달란트를 맡은 자가 두 달란트를 더 남겼을 때에 주인의 칭찬이 동일하다 (마 25:19~23).

하나님께서 정작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의 깨끗함이다. 사람이 돼지우리에서 함께 살 수 없듯이, 주님은 거룩한 분이어서 깨끗한 그릇이 아니면 사용하실 수 없다. 젊은이들이 부잣집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날 때부터 머리가 나쁘다고, 외모가 못났다고 한탄하며 힘과 시간을 소모한다면, 마귀의 속삭임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어떠한 여건과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깨끗함을 추구한다면, 우리 각각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될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깨끗한 그릇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사용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이다. 즉, 깨끗한 그릇은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가슴 저미도록 사랑하시는 순결한 신부인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일생을 통하여 당신의 아름다운 신부로 세워지길 열망하신다. 거룩함이 없이는 주님을 볼 수도 없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옷입을 수도 없다. 신랑 되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신부의 세대, 그들은 곧 거룩한 세대이다.

-플러스 인생(구 신앙계) 2010년 4월호에 게재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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