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1, 2010

칼빈의 생애와 사상

I. 서론

칼빈은 루터와 츠빙글리에 비하여 제2세대 종교개혁자라 칭한다. 루터(1483)와 츠빙글리(1484)가 15세기 말 태어난 인물인데 반하여, 칼빈은 16세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루터가 독창적이고 대담하고 창조적이며 진취적인 개혁가였다면, 칼빈은 개혁사상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이다. 칼빈은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 출생.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 ·경리 등으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1523~15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註解)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533년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다.

그는 이른바 '돌연한 회심(回心)'에 의해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 즉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15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G.파렐에게서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다.



II. 본론

 1. 칼빈의 생애

(1) 성장과 회심

존 칼빈은 프랑스 피칼디 주 노용시에서 1509에 출생하였는데 그곳은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60마일 되는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녀들에 대하여 사소한 일이라도 예사로 생각하지 않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이 아버지 (제넬코반)에게서 지식욕과 조직전 두뇌를 물려 받았고, 어미니 쟌느 르 푸랑에게서는 경건을 배웠다. 그의 가정은 사회적 부와 지위를 함께 가졌었고, 칼빈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법률가였지만 자신의 아들을 처음에는 신부로 만들 생각으로 칼빈이 12세 되었을때 그의 생활비에 넉넉할 만큼의 수입이 있는 교회사 직분에 붙여 주었다. 칼빈은 교직을 목표로 훈련받았고, 학교에서는 조수의 일도 보았다. 1523년 14살때에 칼빈은 멀리 유학을 떠났다. 그는 귀족 몬모르와 젠리의 자제들과 함께 라 마르슈 (La Marche) 대학에 입학 하였다. 당시 라 마르슈 대학은 프랑스 인문주의 신문화의 본산이며, 국왕 프랑소아 1세의 교육제도의 중앙 집권정책에 따라서 견실하게 발전하던 곳이었다. 칼빈은 이 학에서 교수 코디(MaturinCordier)에게 라틴어를 배웠고 이것은 다른 개혁자들보다 훨씬 나은 라틴어를 쓸 수 있게 되었 던 것이다.

칼빈은 그해 몬테그(Montaigue) 대학으로 옮겼다. 이것도 아마 그의 아버지의 지시에 의한것으로 보이는데 더 교회적인 분위기를 가진 곳에서 교직을 목표로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함 같다. 칼빈은 이곳에서 우선 철학을 4년간 전공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527년 그의 아버지의 심경의 변화로 그는 오를레안(Orlean) 대학에서 법학을 배우게 되었다. 이것은 아들로 하여금 좀 더 명예로운 생애를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그는 볼슈(Bourges) 대학에서 공부한 결과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31년 그의 아버지의 세상을 떠나자 칼빈은 법률에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고전을 연구하였다. 그는 법률가 보다는 문필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칼빈은 이곳에서 "세네카의 관용론"에 관한 주설을 출판하여 학계에 데뷰하였다.

1523년 그는 갑작스런 회개를 경험하였다. 칼빈 자신의 말에 의하면 "너무나 완고하게 이 로마교의 미신에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에 그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러운 회개를 통하여 마음이 완악하기로는 누구보다도 더 강하였던 나의 모든 생애를 정복하여 복음을 가르치는 마음이 불붙게 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John Cclvin :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Grand Rapids, Michigan, 1949. P.XL) 라는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되었고, 이기적 자기 추구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발전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 칼빈은 1533년 프랑스 곧 제네바 종교개혁 운동의 선도자로서의 길을 닦기 위해 파기에 있는 프로테스탄트들로 구성된 작은 단체에 가입했는데 그곳에서 얼마 안되는 지도자가 되어 회원들을 가르치고 설교도 하게 되었다.

(2) 회심 그 이후

칼빈은 1535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스트라스버그(strassburg)로 가서 다시 스위스의 바젤로 가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경건한 호구라인 부인댁에 투숙하게 되었고, 그 집에서 1536년 그의 불후의 걸작인 "기독교 강요" 제 1판을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동기는 당시 프랑스의 신교도 박해가 있었고 그 박해의 잘못을 시정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칼빈의 나이는 26세였고, 이 기독교 강요는 사도신경을 줄거리로 하고 모든 성경에 기초하고 있었다.

1535년 제네바에서는 천주교에 치명적인 두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로마 카톨릭의 한 여자가 신교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을 독살하려다가 발각된 사건과 신구교 공개 신학 토론회에서 신교측의 승리였다. 그래서 사실상 제네바는 신교 도시로 바뀌고 있었다. 이때 지도자는 화렐이었다. 화렐은 밤에 칼빈에게 찾아가서 개혁 운동의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칼빈은 자신의 성격과 안맞을 뿐더러 경혐도 없어 거절하려 했으나 화렐이 "그대가 만약 하나님의 일보다 고요한 생활로 독서나 즐기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를 저주하리라" 는 말을 했고, 칼빈은 이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느끼고 제네바 개혁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1536년 10월 1일 로잔에서 열린 성찬 문제로 신.구교파 사이에 토론회가 열렸는데 칼빈은 교부신학을 자유로이 인용하면서 로마 천주교의 잘못을 밝혔고 결국 토론회는 신교의 승리로 끝났다. 그 후 1538년부터 1542년 3년간 칼빈은 스트라스불그에서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그의 사상은 더 넓어지고 깊어졌으며, 결실을 많이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멜랑톤과 일생동안 깊은 우정을 맺었고 루터를 존경하였다. 칼빈은 스트라불그에서 있는 동안 교훈하며 설교하였고, 또한 목회를 했을 뿐 아니라 저술도 많이 하였다. 칼빈은 이때 그리스도교 강요 제2판을 내고 로마서 주석과 성찬에 관한 통속적인 논문이란 책도 썼다. 1540년 한 과부와 결혼하였는데 9년동안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많은 내조를 받다가 1549년 그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2. 칼빈의 신학사상

(1).칼빈 신학의 출발점

칼빈 신학이라고 하면 칼빈이 가르친 신학이라기 보다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 가진 생할부면에 나타난 통일된 세계관으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하지만 칼빈신학을 이해하는데는 무엇보다도 그의 기독교 강요를 쓴 내적 필연성과 그것으로 목적한 바를 알면 된다. 칼빈신학의 문제는 형식 구성이나 사상 연관의 내용적 요소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 사상의 형식이나 내용적 사상 요목은 그 깊은 곳에 있는 연관성을 지시하는 데 그친다. 따라서 그의 신학의 출발점은 그의 회심이 가져온 하나님의 체험에 있었다. 칼홀이 말한 것처럼 "회심의 순간이 그의 전 생애의 진로를 결정했다. 그는 그때이래 루터가 언제나 되돌아간 내적 투쟁에 봉착함이 없는 것처럼 외길로 그 얻은 것의 전개에 돌진하였다." 칼빈의 회심은 이점에서 특징적이며 그것이 그의 신학 사고를 결정지어 주었다. 칼빈의 회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에 억압된 것인 동시에 그를 성서에 복종시킴으로 성립되었다. 칼빈 자신은 자신의 회심을 무가치한 자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었고 이것으로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힘은 증명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저항할 수 없는 힘은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나 의와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칼빈의 신학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이 저항하는 자까지도 복종시킬 만한 힘으로 나타나는 은총의 사실이며 이 신학을 특징짓는 것은 회심에서의 '힘'의 감각이었고 하나님을 능력자로 체험하는 것이었다.(2).신인식

신인식의 문제가 인간에게 본질적인 문제임을 칼빈은 지적하는데 그는 "신인식의 문제는 인간들이 마땅히 일생을 바쳐 탐구해야 할 주제" 라고 말하고 있다. 칼빈이 주도한 제네바교회 신앙문답 제1문에서는 "인생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일"이라고 했고 제3문 에서는 "인간 최고 행복도 신인식" 이라고 했다. 칼빈은 하나님 의식을 특별히 강조하여 그의 모든 사고와 일상생활의 대소 문제에 있어서까지도 하나님의 생각에서 조금도 떠날 수 없었다. 따라서 칼빈의 신인식은 불가피하게 인간 실존의 자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고 이 신인식은 창조자로서의 참되신 하나님 인식으로 이끌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즉 칼빈은 신인식을 어디까지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보았고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령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지식으로 확신했다. 따라서 칼빈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믿음과 일치 대응되는 사상임이 틀림없다. 그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존재 인식이 아니라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으므로 냉담한 사변은 그것을 엿보지 못한다고 보았다. 참된 하나님 인식은 단지 그의 존재를 아는 것 뿐이 아니고 그의 영광도 알고 그에게 대하여 경외의 있어서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생긴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본질은 계시에 의하여 알려지고 계시는 사람의 유한한 이해력에 적응시켜 진다. 즉 하나님의 본질은 사람에 접하면 사람을 죽게 하므로 피조물에 나타나는 것은 그의 영광으로 하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계시의 간접성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을 탐지할 수 없는 높이에서 찾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한도 안에서 인식하라고 주장하였다. 즉 칼빈은 신인식에 있어서 피조물로나 죄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한계를 지었다.

칼빈은 신인식의 원천으로서 창조와 성서를 병립시키며 사람의 본래 마음에는 그것이 타락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씨가 잔존한다고 하여 자연에서 신인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의 기술을 보면 강요 1:2:1에 아담이 순결했더라면 하는 전제도 말했고 종교의 씨는 더러운 미신에, 더러는 의도적인 악행에 기울어지고 열매 맺을 만큼 성숙함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했고 자연적 신인식이란 사람으로변명하지 못하게 하는 것 뿐이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인식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즉 칼빈은 부패한 인간에게 관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상숭배와 모든 미신의 무서운 원천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자연은 신인식의 원천으로서는 불완전한 것이고 오직 성서만이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3).성서론

칼빈은 열광적 영감주의자가 성서 본문을 떠나서 임의의 때와 곳에서 받는 일시적 감명으로 진리 판단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칼빈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있게 우리에게 파악되는 것은 성령의 내적 증거로 된다고 했다. 즉 성서의 으뜸이 되는 증거는 말씀하시는 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또 성서의 말씀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신이 어디에서 오느냐 함을 설명하기를 " 만일 우리가 양심의 참된 관심을 의논컨대 -저희가 심적 동요를 받지 않기 위하여- 또 영속적 의심의 주제를 의논컨대 -저희가 적은 일에 주저 않기 위해서-이 확신을 인간의이성이나 판단이나 추측보다 높은 원천에서 구해야 하는 데 곧 성령의 숨은 증거에서 얻은 것이다."고 하였다. 이 구는 강요 제2판(1541년)에 처음 있는 그대로 실려있고 그 이후 성서의 권위가 항상 제 1원리로 강조 되었다.

칼빈은 성령의 내증을 설명하면서 이 원리는 결코 주관주의가 아닌 성서 본문의 자증력과 그 명료성을 전제로 하고 그 저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시던 성령이 그 문자에 기계적으로 구속 받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독자에게 다시 인격적으로 임하여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이 성경의 권위의 소재를 성령에 두는 것으로 성서 자체가 성스러운 영감받은 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합리적인 증거도 열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의 권위를 받든다고 하여 똑같은 해석을 하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경건히 또는 열심히 존경과 바른 마음으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종종 의견을 서로 달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종들로 하여금 그들이 모든일의 완전하고 충분한 지식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들로 겸손하게 하며 인간이 성서의 진리를 찾아냄에 있어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하기를 권면했던 것이다.

(4).삼위 일체론

칼빈은 전통적인 표현 "인격"이란 술어를 독특한 말 SUBSISTANCE, 즉 존재 양태, 현실 존재로 대치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칼빈은 SUBSISTANCE라고 부른것은 개별적 현실 존재성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요한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 곧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동질성과 개별적인 존재와 특성을 각 인간이 지속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다른 존재 양태에서 관계되어 있으면서 도히려 혼동될 수 없는 특성으로 서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서적 계시에 의한 하나님은 자기를 하나라고 선언하면서 명확한 구별로 세 인격으로 생각하도록 제시하였다고 했다. 이어서 이것을 이행하지 않고는 우리는 참 하나님의 사상이 없고 우리의 머리중에 부동하는 하나님의 공허한 이름만을 가지게 된다고 하여 삼위일체는 신관의 본질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세 인격의 본성은 개별적인 검토에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나치안의 그레고리의 말과 같이 세 인격의 동시조명에서 비로소 한 인격이 이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터틀리안의 말을 인용해서 한 하나님이 계시지만 오히려 배경과 질서에서 그의 말씀이 있다는 것과 본질의 통일에서 한 하나님이 있으나 이 통일이 신비스런 배경으로 삼위에 배정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셋이 있음은 상태로가 아니라 형태에서, 권능에서가 아니라 질서에서 된다고 하였다.터툴리안의 이 세가지 인격의 차이에 대하여 많은 공격이 있으므로 그는 이를 변호하여아들이 아버지 다음 간다고 주장했으나 그는 이것을 인격의 구분에만 적용한 것이지 본질에서는 그런것이 아니라고 했다.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의 특성은 구분되고 부자, 성령이 영원하고 성부에게도 지혜나 권능이 결여되지 않으므로 시간적인 선행 후행을 말할 수는 없으나 질서가 존재 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칼빈은 하나님은 세가지 본체가 있고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양성(신성, 인성)의 완전함을 주장하였다.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하늘을 떠나지 않고서 자의로 처녀의 태중에 계시며 지상을 다니시며 편만하셨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칼빈은 성부와 성자에 관한 이러한 이론을 성령에도 동일하게 적용했는데 왜냐하면 성령을 성부, 성자와 구분이 된 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삼위일체와 위라는 말이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한 실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체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있는 특성에 의하여 구분된다고 보았다. 즉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이 본질에 있어서 일치하며 고유성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관계에서 일치하며 그 행동양식에 있어서도 일치함을 설명함으로써 고대 교회로부터 교회신학이 정립하고 인정한 삼위일체의 한 위로서의 성령의 신격과 그 관계와 행동에 있어서 오류가 없음을 성서상의 증거를 들어 믿고 승인하였다.

(5).성령론

칼빈은 성서에 나타난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하였고 고대 교회 교부들이 인정하고 있는 성령의 신격을 인정하고그 어휘를 사용하였다. 칼빈은 성서의 증거들을 들어서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의심없이 믿고 해명했는데 기독교 강요 제3권에서 성령을 삼위일체의 체계 안에서 성서가 증거하는 성렬이 하나님이심을 해명하고 있다. 그가 '성령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믿고 승인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었는데 첫째, 성령이 사용된 이름이 신이심을 증명한다. 성자가 인격적 존재 이기 때문에 예수(마1:21,25)라는 이름을 가진 것처럼 성령도 인격적 존재 이기때문에 보혜사(요16:7)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였을 때 베드로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라고 책망하였다. 둘째,하나님의 속성이 성령에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즉 영원성(히9:15), 전지성(고전2:10-11), 편재성(시 139:7-8), 생명과 진리의 영(롬8:20, 요16:13)등을 거론하고 있다. 셋째, 성령 훼방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가 용서 받지 못하듯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도 용서르 받지 못한다. (마13:31-32) 네째, 여러가지 은혜를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고전 12:4-11)마지막으로 마태복음 28:19절을 인용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이니 되리라" 에서 이름이 단수로 사용됨에 따라 삼위가 한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칼빈은 성령 하나님이 어떤 현상적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지만 성경에서 여러가지 현상적인 제목을 붙여서 이름을 불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성령을 양자의 영 (SPIRIT A DOPTION), 보증과 인(THE GARANTEE AND SEAL), 물(WATER), 불(FIRE), 생명(LIFE), 기름과 기름부음(OIL AND ANONTING), 샘물(SPRING), 주의 손(HAND OF LORD)등으로 표현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성령을 삼위일체의 한 위로서의 성령으로 보았고, 아버지와 아들의영으로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하여 일하시는 인격적인 영이라고 하였다.

(6). 칭의와 성화

a. 칭의

칭의란 성경에서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는다"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서 칭의라고 한다. 칭의라는 말이 구약에서는 "체다카"란 말로 사용되었고, 신약에서는 "디카이오수네"란 말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믿음과 칭의라는 말이 병용되어 사용되고 있는 데 이것은 구원을 양면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행위에 의해서는 바르다는 증거를 받을 수 없는 죄인이지만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의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에는 신앙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인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이 칭의는 상속이 아니고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다.16) 그래서 칼빈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재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이 사면은 우리 자신의 무죄가 확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였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라고 말하였다. 즉 칼빈은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은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의롭다함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 것으로 해석 하였다.

b. 성화

칼빈에 의하면 칭의가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처럼 성화도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로 칭의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되어지고 성화는 보내주신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조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는 우리를 세상과 분리시키고 영원한 유업의 소망을 갖도록 하시기 위하여 어떤 특별한 방식을 따라 성령과 함께 오셨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그는 성화의 영(SPIRIT OF SANCTIFICATION)이라 불리다고 보았다.

(7). 인간의 타락

칼빈의 인간 타락이전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형사에 관하여 사람의 구성요소 가운데 동물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안의 모든 동물에 뛰어난 요소에까지 미친다. 따라서 이 말은 아담의 지성이 명확하고 감정이 이성에 복종하고 그의 모든 감성이 잘 조절되고 자기가 가진 모든 훌륭한 것은 조물주가 주시는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던 그때에 아담에게 주어진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하였다.이어서 칼빈은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장소에 있었고 진정으로 이은사를 가지고 평화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는 두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는데 그는 불행히도 옳지 않은 부분을 택했으므로 타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칼빈은 원죄의 성격이 부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더 적극성을 띤 아담의 행동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원죄를 설명하는 용어는 교만이라든가 아니면 불순종, 배신, 변절, 범법과 같은 적극성을 띤 용어가 많은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아담이 원죄를 범할 때 범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했거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명렬에 반항하는 행동인 줄 알면서 행한 것으로 보았다. 이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미친 상처는 "인간 존재의 한 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 전체에까지 미쳤다." "머리에서 발꿈치까지 존재 전체가 사악의 홍수에 침몰되고 말았다." 고 그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말하고 있다.

(8). 예정론

이 교리는 철두철미하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사람과 그 은총에 참여치 못하는 사람에 관한 교리이다.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제정을 말한다. 이것으로써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것을 자기가 원하신대로 결정하셨다. 모든 것은 동일한 조건으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어떤이는 영생으로 예정되었고 어떤이는 영원한 파멸로 예정되었다.각자는 이 둘중의 한 편으로 창조되었다. 즉 생명으로나 그렇지 않으면 죽음으로 예정 되었다." 고 칼빈은 말한다. 칼빈은 영원 불변하신 계획으로써 하나님은 단 일회적으로 구원에 용납될 사람과 파멸로 저주 받을 사람들을 결정하셨다고 했다. 선택을 받은 사람에 관한한 이 계획은 사람의 공로와는 전혀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의 넓으신 은총에 의거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저주 받은 자들에게는 의롭고 공평하고 심원한 심판으로써 생명의 문이 닫아지고 말았다고 했다. 칼빈은 예정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소명을 선택의 증거로 생각한다. 동시에 의인을 그들이 영광에 도달할 때까지 선택을 나타내는 또 한가지의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칼빈에 의하면 성서에서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중예정이라고 했다.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택함을 받았다.(엡 1:4)"고 설명한 것은 선택이 성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잘 증명해 주는 것은 물론이며, 로마서 9장에서 바울도 똑같이 말하고 있다고 보았다. 9장 11절에서 13절까지를 보면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을 인용해서 두 계급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 하면서 이사야 53장 1절에 있는 말씀으로 예정론은 넉넉하게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칼빈에 의하면 예정론이나 이중 예정론은 성서에서 가장 정당한 교리로 보았다.




III. 결 론

그의 신학을 보면 신인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도 없고 가까이 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참된 신인식이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이 아닌 그의 영광도 알고 의뢰하고 찬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칼빈은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무오한 성령의 감동으로 된 말씀으로 보았고 이 성경에 의해 모든 것은 증명된다고 보았다. 칼빈의 개혁 운동은 그의 생존시에 이미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유그노(Hugnote) 운동이 칼빈의 사상을 받아들여 1552년 파리 대회에서 칼빈주의적 신조를 채택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칼빈주의자 브라이(Bray)에 의해 1561년 벨직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그의 제자에 의해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어 장로교 국가가 되었다. 영국 교회는 칼빈주의 영향 하에 '39개 신조'를 채택했고 곧 청교도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지역은 칼빈주의 일색으로 변하여 156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이 채택되었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 바젤, 베른 등이 칼빈주의를 따르게 되었다. 칼빈의 종교개혁은 루터와 함께 당시 만연해 있던 유럽의 종교 사회적 한계를 딪고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 서양 근대사회 진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IV. 참고문헌

1.E.S.MOYER,「인물중심의교회사」곽안전,심재원역.서울:기독교서회,1983.

2.W.S. BUSMA,「칼빈」이양호,박종숙역, 서울:도서출판 나단, 1991.

3.김재권,「존 칼빈의 생애와 업적」서울:생명의 말씀사, 1986.

4.이종성,「칼빈-그의생애와사상-」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68.

5.전경제,「칼빈의 생애와 그 신학사상」서울:신교출판사, 1965.

6.전경제,「칼빈의 생애와 신학사상」서울:한신대학 출판부, 1984.

7.정상운,「세계교회사」안양:성결교신학대학교, 1994.

8.정성구,「칼빈의 생애와 사상」서울:세종문화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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