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6, 2010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유일한 근거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태복음 12:7]

믿는 분들 가운데 성경을 보고 적용하는 관점이 바로 서있지 못한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대표적 예로 성경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만 파악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것이 기록될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간주하여 자기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때에 따라 적절히 참조만 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보다 더 나쁜 잘못은 “이 말씀은 누구누구가 읽어야 하는데”라고 남에게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기에게 적용시키지 않으면 말씀이 아닐 뿐 아니라 읽는 자 또한 믿는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적용함에도 잘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뜻부터 먼저 알아야 하는데, 적지 않은 믿는 분들이
그 단계는 생략하고 자기 삶에 바로 적용부터 하려듭니다. 성경이 자기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분명한 인식은 있는데 자기가 남들에게 실천해야 할 사항으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 전에 인간끼리의 관계를 먼저 세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불과 하나의 율법 내지 도덕 교과서가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보통 후반부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 하였으리라”에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그래서 남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나를 향한 뜻이므로 이제는 남들을 쉽게 판단, 비방, 정죄하지 말아야지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맙니다. 전반부인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은 모르고 있거나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선 도덕적 계명 하나를 받은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 계명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위로 나타내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먼저 세운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읽는 자녀들로부터 제사를 받으시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녀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원한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판단, 정죄 받을 일이 너무나 많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로 용서해 주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긍휼을 진정으로 체험했고 이해한다면 감히 남을 정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믿는 분들이 성결함이 없이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거룩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데에 필수적인 선결 사항입니다. 죄가 있으면 그 분의 은혜와 능력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모습이 되는 자는 결코 없습니다. 심지어 평생을 수도원에서 정진만 하는 자라할지라도 단 한 순간도 자신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된 자녀를 향한 그분의 지속적이고도 무한하며 일방적인 용서의 가능성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그 관계를 바로 세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무한항 용서이 가능함, 본문에 따르면 “그 분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한다”는 오직 한 가지 영원한 원칙을 붙드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바라 볼 때, 매순간 하나님으로부터 정죄 받아 마땅한데도 그 정죄가 유예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용서 받고 나아가 더 풍성한 은혜로 인도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하시며 그 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하실 뿐 아니라, 그 분의 일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을 실제 삶에서 체험하면서 매일 기쁨의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로 따지면 당장 죽어야 하는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고 나아가 세상 사람보다 더 풍성하고 활기찬 참 생명력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음이 바로 은혜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은혜 가운데 있게 된 이유나 조건이 우리 쪽에선 전혀 발견되지 않기에 더욱 은혜라는 거지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긍휼과 은혜로 나를 택하셨고 나를 구원하셨고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 뿐 아니라 그 긍휼이 내 평생에 함께 하시어 끊임없이 나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여, 나는 도저히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무릎 꿇습니다” 라는 한마디의 진정한 고백뿐입니다.

우리의 참된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결코 남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부터 지속적인 용서의 가능성이 없다면 한 시라도 살 수 없는 자인데 감히 남을 비방 정죄할 자격이나 권리가 있습니까? 결단코 없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있는 자는 모든 사람들이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베풀어져야 할 너무나 불쌍한 죄인으로 보게 됩니다.

불신자 시절에 갖고 있던, 그래서 남들 앞에 자랑하던 자신의 의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뭐라 해도 저 놈보다는 낫고 착하다”는 것 아닙니까? 도덕적으로 따져서 남보다는 내가 우월하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나서 생각이 어떻게 바뀝니까? 내가 천하의 죄인 중의 괴수가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남을 정죄할 수 있습니까? 남을 조금이라도 정죄한다면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은 하나님 앞에 한 거짓말이자, 그 분 앞에서도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위선입니다.

불신자 시절의 생각이 그대로 살아 있다고 쳐도 그렇습니다. 나도 하나님 앞에 매번 용서 받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놈인데, 나보다도 못한 저 사람은 얼마나 하나님의 자비가 더 필요할까라고 긍휼히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똑 같은 죄인끼리 정죄한다는 것은 너무나 말도 안 되고 웃기는 꼴입니다. 똥 묻은 개들끼리 서로 똥 묻었다고 욕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세계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정죄할 자격과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영역 안에서는 인간끼리 서로 판단하고 정죄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것을 탓할 수도 없고 탓해봐야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로는 도덕적 우월성으로 사람을 판단해선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만 모든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제사를 드리는 뜻에는 복을 받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자기 죄를 사하고자 하는 바람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따르고 또 제물의 질과 양에 따라 사해지는 죄의 종류도 달라집니다. 당연히 인간의 정성과 열심과 치성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인간의 죄를 사하는 조건이나 자격이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를 사하는 제사의 제물도 하나님이 직접 감당하셔야 속죄의 효과가 보장됩니다.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영원 유일한 수단은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속죄제가 십자가에서 이미 영단번(永單番 Once-for-all)으로 드려졌기에 이제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게 오직 자비만 바라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고 그 후 사람끼리의 관계도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은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것뿐입니다. 남을 정죄하지 않는 것이 단순히 신자의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신에 아무리 많은 허물과 잘못이 있는 자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해 가지 않고는 오히려 안타까워 견딜 수 없게 된 자가 신자입니다.

따라서 교인 중에는 두 가지 유형 밖에 없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게 된 자와 아직도 남을 정죄하는 자리에 있는 자입니다. 전자는 자신부터 날마다 그분의 무한한 용서 속에 있는 자이고 후자는 그분 앞에마저 자신의 치성과 의를 앞세우는 자입니다. 다른 말로 그분의 자비만을 구하는 교인과 그분에게 제사만 열심히 드리는 교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엔 전자만을 자녀라고 하지 후자를 두고 자녀라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심각하고 두려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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