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27, 2010

[QT] 에린에게 배우기 (7/28/10)

[고린도전서 12:21-2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시편 145:8

에린의 삶은 보통의 여덟 살 난 아이들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뛰어놀고 아이스크림을 먹지만, 에린은 침대에 누워 튜브를 통해 음식물을 먹으며 아주 밝은 빛만 볼 수 있고 매우 큰 소리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삶은 질병과 극심한 장애와 계속 싸우는 가운데 주사바늘, 간호사, 그리고 병문안 등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에린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아이를 돌본, 그리하여 에린의 삶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줬던 훌륭한 가족에 둘러싸여 아홉 번째 생일이 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말 한 마디 전혀 못하고, 그림에 색칠도 하지 못하고, 노래 한번 불러보지 못했던 에린과 같은 소중한 아이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에린의 가족의 친구 중 한 사람이 그것을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에린이 있었다는 것이 모두에게 너무 좋았어요. 그 아이는 우리에게 연민과, 무조건적인 사랑과, 조그만 일에도 감사할 줄 안다는 게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어요.”

에린과 같은 아이들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 완전한 사람이나 부자, 그리고 유명한 운동선수들을 위하여 예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신체와 정신, 감정이 어떤 상태에 있다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창 1:26-27), 동등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약한 자와 상한 자들, 그리고 주님이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셨으므로(시 145:8-9), 우리도 그 부분에 있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엡 5:1-2). 당신 삶에도 가르침을 주는 “에린”과 같은 아이가 있습니까?


세상에서 무거운 짐으로만 여기고
가치 없는 인생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가르쳐주네
하나님이 귀한 보석과 같이 그들을 사랑하심을

한 영혼의 가치를 절대로 과소평가 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12:21-25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Source: ODB

Monday, July 26, 2010

[유머] 할머니가 성경을 읽는 이유

몹시 추운 겨울날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시러 목사님이 오셨다.
강사 숙소에 할머니 한 분이 오시더니 정성껏 목사님의 시중을 들어주셨다.
목사님이 찬 것을 마시면 감기가 든다면서 콜라까지 보글보글 끓여다 주실 정도였다.

이 할머니는 쉬는 시간 틈틈이 성경을 자주 보고 계셨는데, 이상한 것은 성경을 다 읽지 않고 사람 이름만 읽는 것이다. 목사님이 그 이유가 궁금하여 할머니에게 물어봤다.

“할머니! 왜 사람 이름만 읽고 계신가요?” 그러자 할머니의 명쾌한 대답이 이어졌다.

“아이고 목사님! 곧 하나님 앞에 갈 텐데 성경은 다 읽어서 무엇합니까? 이 사람들이 다 천국에 있을 텐데 이름은 외워 가야 만나면 아는 척하지요.”

[QT] 시선을 고정하라 (7/26/10)

[누가복음 4:1-13]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1-2

운전 교관이 나에게 “앞을 보고 운전하세요.”라고 계속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바로 옆에 것들에 신경 쓰지 말고, 멀리 앞쪽에 집중하라는 그의 교수 방식이었습니다. 계속적으로 좌우를 보는 운전자들은 도랑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탄은 예수님 대신 자기를 보게 유인하는 “운전 장애물”의 역할에 아주 능숙합니다. 만일 사탄이 우리의 주의를 끌게 되면 그는 우리로 하여금 길을 벗어나게 해 우리의 영적성장을 지연시키기도 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도 이 수법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사탄이 와서 주님의 일을 성취하는 “보다 나은” 방법을 제시하며 주님을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림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말했습니다(눅 4:9-11). 그러나 예수님은 높은 건물에서 자신을 내던지는 것으로가 아니라, 자신이 십자가에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증명된다는 것을 아셨기에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12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에 관심이 있으셨고, 십자가를 피해서는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영적인 도랑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히 12:2) 사탄의 유혹에 어떤 눈길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유혹을
극복하는 오직 한 가지 길은
은혜로 강건케 해주시는
주님께 집중하는 것

사탄이 우리 시선 앞에 있지 않고 우리 뒤에 있도록 해야 한다.


누가복음 4:1-13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Souce: ODB

Sunday, July 25, 2010

[QT] 무엇에 대한 자신감? (7/26/10)

[고린도전서 10:1-12]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

건축자재상 앞을 걸어가다가 이런 우울한 메시지가 적힌 빨간 티셔츠를 입은 남자를 보았습니다.
“자신감 : 상황을 이해하기 바로 전 당신이 갖고 있는 느낌.”

나는 이 재미있는 아이디어에 웃고 말았지만, 그 셔츠가 분별력 있고 확실한 경고를 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본인의 능력이나 자격에 근거한 자신감으로만 일을 처리하려는 우리 모두에게 주의를 환기시켜 줍니다. 만약 우리가 인생의 과제들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잘못된 자신감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파멸의 원인이 되고, 우리는 그 실패의 무게에 억눌려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던 자만심과 자족감의 나쁜 버릇을 상기시키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것에 대해 편지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기술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자신들이 받은 그 은혜들을 범죄허가증으로 바꾸어버렸는지, 또 자신들의 파멸의 원인으로 드러날 자만심으로 바꾸었는지 언급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자만심이 우리에 대한 경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시편 118편 8절이 가장 좋은 길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혹은 우리 자신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당신은 누구를 신뢰하고 있습니까?


선 줄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넘어질까 조심하게 하라
이 말은 하나님만이 모두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기억나게 해준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 올바른 자신감이다.


고린도전서 10:1-12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들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Source: ODB

Friday, July 23, 2010

[QT] 간격 메우기 (7/24/10)

[요한복음 1:10-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4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내가 이루어놓은 몇 가지 업적들에 아이들이 감명 받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아이들이 내가 쓴 책들을 읽고, 내 강연에 감명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나중에 나는 그들이 내 책을 아예 읽지 않았고, 내가 어디로 강연을 다녔는지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큰아들이 마침내 내 책을 한 권 읽더니, 단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내 자식들이 내 책을 전혀 읽지 않는다고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책을 읽었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은 부모의 업적에 감명 받지 않습니다. 그들과의 간격을 메워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현재 있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고, 미끄럼 사다리 게임이나 뒤뜰에서 술래잡기 놀이를 하면서 아이들의 세계로 직접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요 1:14] 라고 말했습니다. 달리 말해, 주님은 우리 수준에 맞춰 몸을 낮추어 이 땅에 오셨으며, 이것은 주님의 나라와 이 세상 사이의 간격을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메우신 주님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최고의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합당하시네 우리 평생토록
우리 모든 사랑과 최고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우리 죄와 허물 지시고 주님 돌아가셨네
오, 구주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할지라!

예수님은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셨다.


요한복음 1:10-18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Thursday, July 22, 2010

[유머] 3년만의 고백

내가 그를 짝사랑한 지 벌써 3년이 됐다. 그렇지만 나는 내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고백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친구의 말에 용기를 내어 사랑의 고백이 담긴 편지를 썼다. 그러나 직접 건네줄 기회를 매번 놓쳐 꼬깃꼬깃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에게 편지를 건네주고는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다음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고 내게 만나자고 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그는 내게 말했다. "저... 어제 나한테 2천원 왜 줬어?"

[유머] 십계명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십계명의 순서를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외우면 잊을 수 없고 순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

일 = 일:절 나외에는 "다른신을 두지 말라."
이 = 이:상한 "우상을 섬기지 말라."
삼 = 삼: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사 = 사:업을 하지 말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오 = 오:로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육 = 육:혈포(대포 일종 살인 무기)로 "살인하지 말라."
칠 = 칠:보단장한 여인을 "간음하지 말라."
팔 = 팔:로 "도적질하지 말라."
구 = 구:차한 변명으로 "거짖증거 하지 말라."
십 = 십:원이라도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ODB] Grace, Mercy, And Peace (7/22/10)

[2 Timothy 1:1 - 1:10 ]

Bless the Lord, ... who crowns you with lovingkindness and tender mercies. - Psalm 103:1,4
The words grace and peace are found in all of Paul’s greetings in his New Testament letters to the churches. And in his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he also includes mercy: “Grace, mercy, and peace from God the Father and Christ Jesus our Lord”(2 Tim.1:2). Let’s examine each of these words.

Grace is what our holy God gives that we, as sinful people, don’t deserve. In Acts 17:25, we learn that “He gives to all life, breath, and all things.” His gifts include our very next breath. Even in our darkest hour, strength is given by God so that we can endure.

Mercy is what God withholds that we do deserve. In Lamentations 3:22, we read, “Through the Lord’s mercies we are not consumed.” Even when we’re wayward, God gives time and help for us to turn back to Him.

Peace is what God brings to His people. Jesus said: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to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to you”(John 14:27). Even in the worst of times, we have inner tranquillity because our God is in control.

We can be encouraged that throughout our lives the Lord will give us the grace, mercy, and peace we need to live for Him.


He giveth more grace when the burdens grow greater,
He sendeth more strength when the labors increase;
To added affliction He addeth His mercy,
To multiplied trials, His multiplied peace. — Flint

God’s grace is immeasurable, His mercy is inexhaustible, His peace is inexpressible.


2 Timothy 1:1-10

[1] Paul, an apostle of Jesus Christ by the will of God, according to the promise of life which is in Christ Jesus,
[2] To Timothy, a beloved son: Grace, mercy, and peace from God the Father and Christ Jesus our Lord.
[3] I thank God, whom I serve with a pure conscience, as my forefathers did, as without ceasing I remember you in my prayers night and day,
[4] greatly desiring to see you, being mindful of your tears, that I may be filled with joy,
[5] when I call to remembrance the genuine faith that is in you, which dwelt first in your grandmother Lois and your mother Eunice, and I am persuaded is in you also.
[6] Therefore I remind you to stir up the gift of God which is in you through the laying on of my hands.
[7] For God has not given us a spirit of fear, but of power and of love and of a sound mind.
[8] Therefore do not be ashamed of the testimony of our Lord, nor of me His prisoner, but share with me in the sufferings for the gospel according to the power of God,
[9] who has saved us and called us with a holy calling, not according to our works, but according to His own purpose and grace which was given to us in Christ Jesus before time began,
[10] but has now been revealed by the appearing of our Savior Jesus Christ, who has abolished death and brought life and immortality to light through the gospel,

Source: ODB

[QT] 은혜와 긍휼과 평강 (7/23/10)

[디모데후서 1:1-10 ]

여호와를 송축하라...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시편 103:1,4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는 바울이 교회들에게 보낸 신약성경 서신서의 모든 인사말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는 긍휼이라는 단어가 추가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후 1:2). 이 단어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은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5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라고 배웁니다. 우리의 바로 다음 순간의 호흡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가장 힘든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능히 견뎌낼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긍휼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류하고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제멋대로 살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시간과 도움을 베푸십니다.

평강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기에 우리는 내적 평안함을 가집니다.

주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주님을 위해 사는데 필요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주신다는 사실에 우리는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짐이 무거워질 때 주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시고
일이 많아질 때 주님은 더 강한 힘을 주시네
고난이 더해지면 주님은 긍휼을 더하시고
시련이 늘어나면 주님은 평강을 늘려주시네


하나님의 은혜는 측량할 수 없고, 그의 긍휼은 다함이 없으며,
그의 평강은 표현할 길이 없다.


디모데후서 1:1-10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Source: ODB

Wednesday, July 21, 2010

[ODB] Hope (7/21/10)

[Psalms 23:1-6]

You are my hope, O Lord God; You are my trust from my youth. -Psalm 71:5
The ancient road from Jerusalem to Jericho is a narrow, treacherous path along a deep gorge in the Judean wilderness. Its name is Wadi Kelt, but it’s known as the valley of the shadow, for this is the location that inspired David’s 23rd Psalm. The place itself offers little reason to compose such a hopeful poem. The landscape is bleak, barren, and perilously steep. It’s a good place for thieves, but not for anyone else.

When David wrote, “Yea,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v.4), he was in a place where evil was an ever-present reality. Yet he refused to give in to fear. He wasn’t expressing hope that God would abolish evil so that he could pass through safely; he was saying that the presence of God gave him the confidence to pass through difficult places without fear of being deserted by Him. In another psalm, David said that the Lord was his hope (71:5).

Many claim to have hope, but only those whose hope is Christ can claim it with certainty. Hope comes not from strength, intelligence, or favorable circumstances, but from the Lord. As Maker of heaven and earth, He alone has the right to promise hope and the power to keep the promise.


Our strength and hope is in the Lord—
We rest secure in His sure Word;
And though we’re tempted to despair
We know we’re kept within His care. — D. De Haan

Hope for the Christian is a certainty—because its basis is Christ.


Psalm 23:1-6

[1] A Psalm of David.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2] He makes me to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the still waters.
[3] He restores my soul; He leads me in the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
[4] Yea,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
[5] You prepare a table before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You anoint my head with oil; My cup runs over.
[6] Surely goodness and mercy shall follow me All the days of my life; And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QT] 소망 (7/22/10)

[시편 23:1-6]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시편 71:5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통하는 오래된 도로는 유대 광야에 있는 깊은 계곡을 따라 이어진 좁고 위험한 길입니다. 그 길의 이름은 ‘와디 켈트’이지만 ‘그림자 계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곳이 다윗에게 시편 23편의 영감을 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장소 자체는 그러한 희망적인 시를 짓는 데 아무것도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풍경은 황량하고 메말라 있으며, 위험하게 가파른 경사가 있습니다. 산적들에게는 좋은 장소일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4절)이라고 썼을 때, 그는 해를 당하는 것이 늘 현실적으로 가능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워 굴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해를 없애주셔서 그가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가 힘든 장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두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시편에서 다윗은 주님이 그의 소망이라고 말했습니다(71:5).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리스도가 소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만이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소망은 힘이나 지능, 혹은 유리한 여건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소망을 약속하실 권리와, 그 약속을 지키실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의 힘과 소망은 주님 안에 있으니
주님의 확실한 말씀 안에서 편안히 쉴 수 있네
우리가 자포자기하고픈 유혹을 받더라도
주님이 우리를 보살피시며 지키신다는 것을 아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확실한 것이다.
그 기초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시편 23:1-6

[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Source: ODB

Tuesday, July 20, 2010

[유머] 착한 마음으로 남을 돕자

놀부 마누라가 장에 갔다. 다들 놀부 마누라의 고약한 성질을 아는지라 슬슬 피해 다녔다.
그런데 어느 간 큰 거지 한 명이 놀부 마누라에게 오더니 "마님, 한 푼만 줍쇼." 하는 것이었다.
심술기가 발동한 놀부 마누라는 지나가던 똥개 한 마리를 잡아와서는 "네가 이 똥개에게 아버지라고 한번만 부른다면 내가 동전 한 닢을 주지" 라고 말했다.
"한번 부르면 한 닢이라굽쇼? 그럼 열 번 부르면요?"
"그럼 당연히 열 닢을 주지."
흥미로운 구경거리에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이 거지는 정말로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하고 열 번을 불렀다. 놀부 마누라는 배꼽이 빠져라 웃고는 약속대로 동전 열 닢을 주었다.
그러자 이 거지는 더욱더 목청을 돋우어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감사해요, 어머니!!"

[유머] 하나님의 것과 내 것

김 집사와 이 집사와 박 집사, 세 사람이 모여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얼마만큼 바칠 것인가에 대한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하고 박집사가 말했다. "나는 먼저 땅에 줄을 긋고 내가 가진 돈 전부를 공중에 던집니다. 줄 오른편에 떨어진 돈은 하나님께 바치고 왼편에 떨어지면 내 주머니에 넣습니다."
"썩 좋은 방법이 못되는데요." 하고 이집사가 말했다. "나는 땅에 원을 그려놓고 내 돈을 공중에 던지지요. 원 안으로 떨어진 돈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원 바깥에 떨어진 것은 내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자 김집사가 돌아서서 한숨을 쉬고는,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께 바칩니다." 라고 말했다.
"그만 웃기시오, 뭐! 모든 걸 다 바친다구요." 다른 두 사람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김집사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돈 전부를 던집니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공중에 머무는 것은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것은 모두 제 것입니다."

[QT] 마지막 작별인사 (7/21/10)

[디모데후서 4:6-22 ]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디모데후서 4:6]

말기암 선고를 받은 47세의 랜디 파우쉬는 동료들과 학생, 그리고 친구들에게 마지막 강의를 하기 위해 카네기 멜론 대학으로 돌아왔습니다. 컴퓨터학 교수인 그는 150 명 정도가 자기의 강의를 들으러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400석의 강당이 가득 찼습니다. 한 시간 동안 파우쉬 교수는 청중에게 마음을 열고 죽음보다는 삶에 더 중점을 둔 유머와 통찰력으로 감동적인 고별강연을 했습니다. 몇 주가 안 되어 수백만의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강의 비디오를 보았고, 이 강의는 후에 베스트셀러가 된 책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는 인생에서 무엇이 진실로 중요한가에 대해 종종 이례적으로 명료한 관점이 있습니다.

바울사도의 마지막 작별인사는 지난 세기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었습니다. 바울은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썼습니다(딤후 4:6-7). 디모데에게 전한 바울의 가르침은 여러 세대를 거쳐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도전을 줍니다. 그의 편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끝이 나며(1:2; 4:22), 그 중간에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신실하심에 대한 찬양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죽어가는 자의 메시지는 살아있는 자에게 삶의 목적을 줄 수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4:18)라는 바울의승리의 피날레는 우리 모두가 간직하고 살아가야 할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아니면 사라질 것들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세상의 칭찬을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날에 “잘했다”는 주님의 칭찬을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우리가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면, 살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4:6-22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21]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Monday, July 19, 2010

[QT]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7/20/10)

[디도서 3:3-11]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데살로니가전서 5:22

내 손녀 하나는 몇 가지 음식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우유, 치즈, 달걀, 그리고 아이스크림 등이 피해야 할 음식에 속합니다. 그 음식들은 아주 작은 양이라도 이 아이에게 해롭습니다.

인생에서 피해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은 그 아이뿐만이 아닙니다. 알레르기가 몸의 건강에 관련된 것이라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 우리 각자에게는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멀리해야 할 위험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모양의 악(살전 5:22).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는 선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명백한 악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활력에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분쟁(딤후 2:23; 딛 3:9). 이것은 분별력이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변론은 믿음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답이 없거나 진실이 담겨있지 않은 변론은 불화를 일으킬 뿐입니다.

음란(살전 4:3). 성경은 결혼의 범위를 벗어난 남녀 간의 어떤 성적행위도 간음이라고 했습니다(창 2:24; 출 20:14; 고전 7:2; 히 13:4).

당신은 영적으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것들을 피해가기 위하여기꺼이 노력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오늘 죄가 유혹하는 미끼들을 피하고
악한 생각들을 제어하라
그렇지 않으면 악한 것들이 당신을 조종하고
언젠가 당신을 지배하게 되리라!

죄를 피하려면 유혹의 싹을 잘라 버려라.


디도서 3:3-11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Saturday, July 17, 2010

[QT] 비판하지 말라 (7/18/10)

[고린도전서 4: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태복음 7:1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라고 명하셨을때, 그것은 우리가 순진해야 된다거나 분별이 없어야 된다는 것을 뜻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는 실수나 잘못된 행동에 자주 마주치는 세상에서 비판적이며 분별력 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주님이 의미 하신 것은 우리가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점을 생생하게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고전4:5).

시인 로버트 번즈는 행동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바울과 비슷한 지적을 했습니다. “아직도 알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기’, 즉 그들이 왜 그런 일을 하는가입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들의 동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어두움 속에 감춰진 것을 밝히 드러내실 수 있고, 그분만이 마음의 의도를 들춰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이나 두려움, 좌절, 상한 마음, 억눌린 죄와 같이, 사람들의 동기를 유발하는 잠재된 힘들을 아십니다. 나아가 주님은 모든 순종하는 마음속에서 그 마음이 성숙하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종종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주님은 주님께서 완전하게 만드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주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때까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살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구합시다.


“비판하지도, 정죄하지도 말라”고
형제의 잘못을 감시하지 말라 하셨네
우리에게 주어진 오직 한 가지 과제는
스스로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다스리는 것이라네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은 천천히 하고,
자신에 대한 판단은 빨리 하라.


고린도전서 4:1-5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Thursday, July 15, 2010

[유머] 유대인의 윤리관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우리가 따라야 할 윤리란 어떤 것인가요?]
[쉽게 예를 들면 이렇지, 만약 손님이 물건값을 내고 거스름돈 50살랑울 잊은 채 그냥 갔다고 하자. 이때 이 50실링을 혼자 호주머니에 넣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동업자와 똑같이 나누어 가질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QT] 거래냐 아니냐 (7/16/10)

[누가복음 15:11-24]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 누가복음 15:19

당신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수지맞는 거래를 좋아할 것입니다. 단지 할인가격으로 쇼핑뿐만 아니라, 그 대가로 어떤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굉장한 거래를 하게 된 경우 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거래를 이해할 수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탕자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세 종류의 하인들이 있었는데, 매일 하는 일에 따라 급여를 받는 일용직 품꾼, 마을에 독립적으로 따로 살면서 주인집에서 장시간 일하는 고용하인, 주인집에 살면서 온전히 주인 가정을 위해 일하는 종속하인이 그것입니다.

탕자가 완전히 밑바닥까지 전락했을 때, 그가 사죄를 계획하면서 고용하인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어째서 감사하면서 종속하인이 되려하지 않았을까요? 일부 주석학자들은 아마도 그가 급여를 받으며 동시에 자기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방식의 흥정을 시도했으리라고 합니다.

우리도 종종 하나님께 나아갈 때, “제가 주님을 섬기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주님께서 제 자유를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라는 태도를 취합니다. 그것이 당장은 좋은 거래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래가 훨씬 좋습니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팔을 펴시고 회개하며 나오는 죄인을 기꺼이 그분의 가족으로 받아 주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거래도 없고 더 좋은 방법도 결코 없습니다!


주님, 제 삶을 받아 온전히 주의 것으로 만드시며
내 가난한 심령을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채우소서
제 모든 뜻과 열정과 자아와 자랑까지도
지금 내려놓사오니, 주님 제 안에 거하소서

그리스도께 내려놓을 때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


누가복음 15:11-24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Wednesday, July 14, 2010

[유머] 짧은 설교

어느 교회를 방문한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 짧은 설교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설교를 다 준비했는데 그만 제 개가 서재에 들어와서 설교 원고를 반이나 찢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어느 장로님이 이렇게 부탁을 했다.
"목사님, 목사님의 개가 새끼를 가졌을 때 저희 목사님 것으로 한 마리 주시겠습니까?"

[QT] 우리 가운데 가난한 자 (7/15/10)

[ 신명기 15:7 - 15:11 ]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신명기 15:7

프랜시스 찬은 자신의 책 「열광적인 사랑」에서 흥미있는 성탄절 전통을 가진 한 가족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탄절 아침에 로빈슨 가족은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있는 선물을 열어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에 팬케이크와 커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하여 노숙자들에게 제공합니다. 이것은 비록 작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관대하심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창조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관대함을 기대하셨습니다. 신명기 15장에서 모세는 가난한 자들의 실상을 강조하며 부자들이 어떻게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지 말했습니다. 그들은 네 가지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 받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외면하는 강퍅한 마음(7절).

가난한 자들에게 결핍된 것을 움켜쥔 닫힌 손(7절).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워지니 가난한 자들에게 돈 빌려 주기를 주저하거나 거부하는 악한 생각(9절).

그들 가운데 있는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대해 망설이는 인색한 마음(10절). 그들은 이기심에 대해 경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자발적으로 관대해지라고 권면 받고 있었습니다(8,10,11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대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손과 마음을 폅시다.


하나님의 자녀가 보여줄 수 있는 한 가지 은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베푸는 것
그러나 부요해질 때까지 기다린다면
아마 우린 결코 시작도 못하리라

관대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신명기 15:7-11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Tuesday, July 13, 2010

[유머] 식사기도

어느 집에서 손님들을 초청하여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집주인인 엄마가 6살 된 딸에게 말했다.
"오늘 식사기도를 네가 한번 해볼래?"

그러자 딸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엄마, 난 기도할 줄 모르잖아."
"그냥 엄마가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되지." 그러자 딸이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왜 자꾸 우리 집에 귀찮은 손님들이 많이 올까요??

[유머] 간절한 기도

표류당한 두 사람의 유태인이 구명 보트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망망한 바다뿐이었다.

한 유태인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오, 하나님, 만약 저를 구해 주신다면 저의 재산의 절반을 바치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풍랑만 심할 뿐이었다. "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살려 주신다면 제 재산의 3분의 2를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다시 아침이 되어도 구원의 손길은 닿지 않았다. 유태인은 다시 간절한 기도를 시작하였다. "하나님, 제발 저의 이 간절한 기도를 받아 주십시오. 제 목숨을 구해 주신다면 저의 재산..."
그 때 다른 유태인이 소리쳤다. "이봐 거래를 중단해 저기 섬이 보여!"

[QT] 세상일을 행하는 자 (7/14/10)

세상 일을 행하는 자
[야고보서 1:19-27]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1:22
우리가 새 동네로 갓 이사한 뒤 시누이와 그의 남편을 주일 저녁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문에서 수와 테드를 맞이하려는 순간 부엌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가 그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들의 눈길을 따라 돌아보던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낡은 이동식 식기세척기의 고장난 호스가 마치 성난 코끼리의 코가 요동치듯 물을 사방으로 쏟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는 주저하지 않고 움직였습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나보다 먼저 부엌에 들어가 물을 잠그더니 수건과 대걸레를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우리 집에 오자마자 15분 동안 우리는 무릎 꿇고 걸레질을 했습니다.

수는 행동가입니다. 세상은 행동하는 사람들로 인해 더 나은 곳이 됩니다. 이들은 언제나 도와주고, 참여하고, 필요하다면 리더가 될 준비까지도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일을 행하는 많은 사람들은 또한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1:22)라는 야고보의 권면을 마음에 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모두 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운 것들을 행동에 옮기십시오. 먼저 듣고, 그 다음 실행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순종한 결과로 임하게 됩니다(25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네
하지만 잘 실행하지 않으면서
듣기만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네

성경의 가치는 그것을 알기만 하는 데 있지 않고
순종하는 데 있다.


야고보서 1:19-27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Monday, July 12, 2010

[유머] 물 위를 걸으려 했더니

어떤 청년이 은혜에 충만하여(?) 성경에 예수님과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던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나보다 더 큰일도 할 수 있다고 하신 것과 산을 옮길만할 믿음도 있다는 기억이 있어 믿음을 가지고 한강을 건너기로 하였다.
물위로 한발 내어 딛었을 때 물위로 걸어갈 것이라고 믿었던 청년은 그만 물에 빠져들어 실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일로 목사님을 찾아가 따지듯 물었다.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도 있다고 하고 제자들은 물 위를 걸었는데 저는 기도하고 은혜도 충만한데 왜 물에 빠지는 것입니까?" 목사님은 이 청년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셨나요?"
"아니요."
"그러니까 빠지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걸어오라고 하셨습니다."

[QT] 영적 여행 (7/13/10)

[ 사도행전 17:22 - 17:31 ]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데살로니가전서 1:9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으로 바로의 여러 신들이 도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신만 믿을 것을 장려하는 바로가 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아크나텐이라는 바로는 뜨고 지는 태양을 가리켜 땅에 생명을 주는 위대한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태양신 아톤의 종교적 상징은 섬광이 발산되는 원반모양의 빛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바로의 이런 아이디어는 오직 한 분이신 성경의 하나님과 흡사했지만, 역시 우상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 그 도시의 우상숭배를 보고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여 그들을 성경의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다”(행 17:24)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이 점점 다원론적으로 되어가면서 우리 주위의 사람들도 다양한 신들에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적 여행을 거기서 끝나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언제 하나님 나라로 인도될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우리도 바울을 본받아서 어떤 사람의 종교적 배경을 존중해 주고, 영적 감수성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그를 참되신 성경의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우리를 도우셔서
길 잃은 자들이 헛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소서
홀로 참 생명을 주시는 유일하신 하나님,
주님께 그들을 인도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하나님만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사도행전 17:22-31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Sunday, July 11, 2010

[탈무드] 어떤 유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어떤 현명한 유태인이 자기 아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학교에 유학시켰다. 그런데, 아들이 예루살렘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이에 부친은 중병에 걸려, 죽기 전에는 아들을 못볼 것 같아 유서를 남겼다. 유서의 내용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한 하인에게 물려주고 아들이 원하는 것 한 가지만은 아들에게 주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부친이 세상을 뜨자. 그 집 하인은 자기에게 행운이 돌아왔음을 기뻐하며 예루살렘의 주인 아들에게 달려가 부친이 돌아가셨다고 전하였다. 그리고 유서를 보여주자. 아들은 매우 놀라고 크게 슬퍼하였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아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한 끝에 그는 랍비를 찾아가 전후 사정을 설명하였다.

[아버지는 어째서 재산을 조금도 남겨 주시지 않았을까요?지금껏 나는 아버지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데요.]
아들이 불평을 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하자 랍비는, [천만에 그렇지 않소.당신 부친께서는 매우 현명한 분으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셨소.이 유서를 살펴보면 부친의 마음을 잘 알 수가 있소.]
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들은 '하인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 주고 자식에게는 아무것도 남겨 주시지 않았습니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분이 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하고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도 부친과 같이 현명하게 머리를 써야 하오. 당신이 부친의 참뜻을 이해한다면, 당신에게 훌륭한 유산을 남긴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만일 여러분들이 아들의 경우라면 유서의 참뜻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랍비는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의 부친은 운명할 때 당신이 집에 없었기 때문에, 하인이 재산을 가지고 도망치거나,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리거나, 심지어는 자기의 죽음마저도 당신에게 전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모든 재산을 하인에게 주신다고 한 것이오.

모든 재산을 하인에게 주게 되면, 그는 기뻐서 당신에게 달려가 그런 사실을 알릴 것이고, 재산도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오. [하지만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들이 묻자, 랍비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역시 젊은이라 지혜가 모자라는군요. 하인의 재산은 전부 주인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모르오? 당신의 부친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것 한 가지만은 당신에게 물려 준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소.그러니까 당신이 그 하인을 소유한다고 하면 그것으로 모든 재산은 당신의 것이오. 이 얼마나 현명하고 애정이 깊은 생각이오.]
뒤늦게 아버지의 참뜻을 깨달은 젊은이는 랍비가 가르쳐 준 대로 한다음, 그 하인은 해방시켜 주었다. 그 후 젊은이는 항상 '역시 나이 많은 사람의 지혜는 따라갈 수가 없다'고 말하곤 하였다.

[탈무드] 하나님이 맡기신 보석

어떤 랍비가 안식일에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두 아이가 집에서 죽고 말았다. 아내는 아이들의 시체를 이층으로 옮긴 뒤 흰 천으로 덮어 주었다.

마침내 랍비가 집에 돌아오자.아내는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귀중한 보석을 잘 보관해 달라고 맡기고 갔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 주인이 나타나 맡긴 보석을 돌려 달라고 했어요. 그럴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랍비는 어렵지 않다는 듯이 '말할 것도 없이 맡은 보석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되겠지.' 그때 아내가 울먹이며 말했다.

[실은 조금 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셨던 귀중한 보석 두개를 찾아가지고 하늘로 돌아갔어요.]
랍비는 아내의 말을 알아 듣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유머] 아담은 한민족 아니다.

어떤 분이 "아담이 어느 민족이었는지 아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글쎄요. 잘 모르지만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으로 보아 한국 사람은 분명히 아닙니다."
"왜요?"
"한국사람 같으면 선악과를 먹지 않고 뱀을 잡아먹었을 것입니다."

[QT] 말하기 전에 행동으로 보여라 (7/12/10)

[마태복음 5:11-16]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


서부 해안에 있는 어떤 도시가 한때는 미국에서 복음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지역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커피숍에는 싫어하는 사람에게 마술을 거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마법동호회 광고 포스터가 나붙어 있곤 했습니다.

교회에 대해 너무 비우호적인 환경이었기 때문에 교회가 시의회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으려면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교회지도자들 사이에 “고통스럽다”는 말들이 많이 오고갔습니다. 몇 명의 목사들이 정기적으로 기도모임을 갖기 시작하다가, 그들이 사는 곳에 예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보자는 결의를 하게 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들은 노숙자, 에이즈 환자, 위험에 처한 10대 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신실하면서도 계획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도시의 여러 기관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더 좋았던 것은, 행동으로 실천되는 복음에 사람들이 반응하게 되면서 교회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말하기 전에 때로는 먼저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입증해 줍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마 5:16). 우리가 행동으로 보여줄 때, 복음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던 사람들조차 우리가 그들 동네에, 사무실에, 또 이웃에 있는 것을 반기게 될 것이며, 그때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귀한 피로 구속 받았으니
하나님이 불러주신 대로 앞으로 나아가세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주님의 삶을 살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먼저 복음대로 살아야 한다.


마태복음 5:11-16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Source: Our Daily Bread

[탈무드] 혀

혀 (1)

어떤 장사꾼이 골목을 돌아다니며 외치고 있었다.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팝니다. 싸게 팝니다.]
그러자 눈깜짝할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골목을 메웠다. 그 가운데는 랍비들도 몇 사람 섞여 있었다.

'내게 파시오, 나도 사겠소, 값은 후하게 주겠소'하고 여기저기서 다투며 사람들의 외쳐댔다. 그러자 장사꾼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을 진실로 참되고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자기 혀를 조심해 쓰는 것이요.]


혀 (2)

어느날 랍비는 자기가 맡아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잔치상에는 소와 양의 혀로 요리한 음식도 나왔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딱딱한 혀와 부드러운 혀의 요리가 있었다. 학생들은 부드러운 혀의 요리만 골라 먹었는데, 이것을 본 랍비가 말했다.

[너희들도 항상 혀를 부드럽게 간직할 수 있도록 해라. 혀가 딱딱하게 굳은 사람은 남을 노하게 하거나 서로간 불화의 씨를 만드니까.]


혀 (3)

어느날 랍비가 자기 하인에게 시장에 가 맛있는 것을 골라 사오라고 시켰다. 그랬더니 하인은 혀를 사 왔다.

며칠 뒤 랍비는 또 하인에게 오늘은 좀 값이 싼 음식을 사오라고 명했다. 그런데 하인은 또 앞서와 같이 혀를 사왔다.

랍비는 언짢아 그 까닭을 물었다.

[며칠 전 맛있는 것을 사오라 했을 때 혀를 사왔고 오늘은 싼 음식을 사오라 했는데 어째서 또 혀를 사왔느냐?]

그러자 하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좋은 것으로 치면 혀만큼 좋은 게 없고 나쁜 것으로 치면 혀만큼 나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탈무드란?

한 젊은이가 유태인에 대하여 연구하려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구약성서를 공부하고, 이어 유태인에 관한 많은 서적들을 탐독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유태인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유태인을 이해하려면 유태인의 생활 규범인 <탈무드>를 공부해야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어느날 유태교의 승려인 랍비를 찾아갔다. 랍비란 유태인에게는 스승이고,재판관이기도 하며,때로는 어버이가 되기도 하는 매우 존경받는 존재이다. 랍비는 자기를 찾아온 젊은이게 '당신은 <탈무드>를 공부해 보겠다는 결심을 세운 모양이지만 아직 <탈무드>를 앞에 펼쳐 놓을 자격조차 없는 듯하오'하고 - 한마디로 단정지어 말하였다. 하지만 젊은이는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한테<탈무드>를 공부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 시험해 보고 결정해 주십시오.]

젊은이의 간곡한 부탁에 랍비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두 아이들이 집에서 굴뚝 청소를 하게 되었소.그런데 두 아이 중 한 아이는 얼굴에 그을음을 잔뜩 묻히고 내려 왔는데,다른 아이는 얼굴이 말끔한 채 굴뚝에서 내려 왔소. 이 두 아이 중 누가 얼굴을 닦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젊은이는 너무 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그야 물론 얼굴이 더러운 아이가 씻겠죠.]
젊은이의 대답을 예상이나 한 듯 랍비는 냉정하게 말하였다. [역시 당신은 <탈무드>를 공부할 자격이 없소.]
[랍비님,그렇다면 맞는 말이 무엇입니까?]
[만일 당신이 <탈무드>를 공부하게 되면, 그 물음에 지혜로운 답을 말할 수 있을 것이오.]

랍비는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두 아이들이 굴뚝 청소를 마치고 지붕에서 내려 왔소 그런데 한 아이는 말끔한 얼굴이었고, 또 한 아이는 얼굴에 그을음을 묻히고 있었소, 깨끗한 아이는 얼굴이 검은 아이를 보고는 '내 얼굴도 검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고 ,얼굴이 검어진 아이는 얼굴이 깨끗한 아이를 보고 내 얼굴도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오.]
이때 젊은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제 알았습니다. 다시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랍비는 웃음을 띠면서 앞서와 같은 내용을 다시 물었다. [두 아이들이 굴뚝을 청소했는데, 한 아이는 얼굴이 깨끗하고, 한 아이는 얼굴이 더러워졌는데,과연 어느 아이가 얼굴을 닦는다고 생각하시오?]

젊은이는 자신있게 대답하였다.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닦습니다. 그러나 랍비는 이번에도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차갑게 말하였다. [역시 당신은 <탈무드>를 공부할 만한 자격이 없는 것 같소이다.]
젊은이는 너무도 낙심하여 지친 표정이 되었습니다. [랍비님,도대체 <탈무드>에서는 어떤 대답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랍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아이가 똑같이 굴뚝을 청소했는데 어떻게 한 아이는 깨끗하고 한 아이는 더러워질 수가 있겠소? 두 아이가 다 얼굴이 더러워졌을 테니 둘다 씻을 것이오.]

다음 이야기는 최근에 생긴 일인데,어느 날 어떤 이름난 대학 교수가 내게 전화를 했다. 내용인 즉슨 <탈무드>를 연구해 볼 생각인데 하룻저녁이면 충분할 터이니 책을 좀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쾌히 승낙하고는 그러나 점잖게 한가지 덧붙여 말해 주었다. [빌려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책을 가지러 올 때는 꼭 트럭을 한대끌고 오시기 바랍니다.]

<탈무드>는 권수로 모두 20권이며,12,000페이지에다 단어의 수만도 무려 250여 만개 이상이며, 그 무게가 75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엄청난 분량의 책이기 때문이었다. <탈무드>란 과연 어떤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또 어떤 내용의 책인가를 이해시키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너무 간단하게 말해 버리면<탈무드>의 진정한 의미에서 벗어나기 쉽고, 그렇다고 좀 상세하게 설명하게 되면 그야말로 한이 없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해 <탈무드>란 책이 아니고 문학이다.12,000여 페이지에 이르는 <탈무드>는 기원전 500년부터 시작되어 기원후 500년에 걸쳐 천년 동안이나 구전되어 온 것들을 수많은 학자들이 10여년에 걸쳐 수집 편찬한 것이다 또한 이 <탈무드>는 기원전 500년부터 시작되어 기원후 500년에 걸쳐 천년 동안이나 구전되어 온 것들을 수많은 학자들이 10여년에 걸쳐 수집편찬한 것이다. 또한 이 <탈무드>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생활 속에까지도 깊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이것은 유태인들의 5000년에 걸친 지혜이며,지식의 보고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탈무드>는 유능한 정치가나 과학자 또는 철학자 ,저명인사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학식 있는 학자들에 의해 문화, 종교,도덕,전통 등이 망라되어 엮어진 것이다.때문에 <탈무드>에는 법전은 아니지만 법률이 있고 역사책이 아니지만 역사의 내용도 들어 있으며, 인명 사전이 아니지만 많은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기도 하여 백과사전 같은 내용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무엇이며, 또한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무엇이고,사랑이란 무엇인가? 5000년의 기나긴 세월을 살아 온 유태인들의 온갖 지적 재산과 정신적 자양분이 모두 이 <탈무드>한 권에 담겨져 있다.

이렇게 볼때, <탈무드>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값진 문헌이며, 화려하게 꽃피운 문화의 모자이크이다. 서구 문명을 만들어 낸 문화의 양식이나 서양 문명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탈무드>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탈무드>란 히브리 어로 미슈나(Mishnah), 즉 '가르치다'라는 의미에 관련된 교훈이나 설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본 <탈무드>의 원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구약성서에 이른다. <탈무드>는 <구약성서>가 씌여진 뒤 유태교의 법률, 전통적 습관, 축제, 민간 전송, 해설 등을 모아 편찬한 것으로 성서 다음으로 유태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왔다.

여기에는 유태인들의 종교적 생활만이 아니라 법적 규정이나 판례법 까지도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 유태민족의 생활양식은 물론 기독교와의 관계를 아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탈무드>는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것 (약 4세기 말경 편찬)과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것(약 6세기경 편찬)의 두 종류가 있다. 그래서 앞의 것은 <팔레스타인 탈무드>, <예루살렘 탈무드>라고 부르며, 뒤의 것을 <바빌로니아 탈무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에는 [바빌로니아의 탈무드]가 더 비중있는 책으로 그 권위가 인정되어 일반적으로<탈무드>하면 이 [바빌로니아의 탈무드] 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

<탈무드>가 책으로 엮어져 정착되기 전에는 선생에서 제자에게로 구전되어 전승되었다. 때문에 내용의 대부분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내용의 범위도 광범위하여 모든 테마들이 히브리어나 아랍어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글로 옮겨질 때도 문장에 필요한 부호나 구둣점같은 것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머리말이나 맺는 말도 없는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체제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탈무드>가 만들어지던 그 당시에는 내용이 양적으로 방대하였고,때문에 유태인들은 <탈무드>의 일부분이 잊혀져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전승자들을 각처에서 두루 모았다.

유태인들은 그때 전승자들 가운데서 머리가 뛰어나게 우수한 사람은 일부러 제외시켰는데,그것은 <탈무드>를 전승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의견이나 소신을 가미시킬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탈무드>가 왜곡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탈무드>는 독서용이 아니고 배우기 위한 책이다. <탈무드>란 말은 "위대한 연구","위대한 학문이나 고전 연구"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탈무드>를 읽지 않았어도 이미 여러분은 <탈무드>의 연구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남겨진 1페이지는 독자 여러분의 경험을 기록하기 위해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은 <탈무드>는 끝없이 넓고 커서 모든 것이 다 그 안에 담겨져 있고,또한 그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하여 <탈무드>를 '바다'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탈무드>가 이처럼 광범위한 내용을 다룬 방대한 것이라 하여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다.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두 사람의 남자가 오랜 여행을 한 탓으로 몹시 배가 고파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느 방엔가를 들어갔을 때,천장에는 과일 바구니가 매달려 있다. 이것을 본 한 남자가 말했다. [저 과일을 먹고는 싶은데, 너무 높이 매달려 있어서 먹을 수가 없군.]
이때 다른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난 저것을 꼭 먹고야 말겠네.아무리 높이 매달려 있다 해도 틀림없이 누군가가 저기에다 걸어 놓은 것이 아닌가.그렇다면 나라고 해서 저기를 올라가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 남자는 어디에선가 사다리를 구해 와 그것을 밟고 올라가 그 과일을 꺼내 먹었다.

<탈무드> 가 아무리 훌륭하고 내용이 심오한 것일지라도 이 또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때문에 사람이 만들어낸 것을 사람이 자기의 것을 만들지 못할 이유 또한 없다. 다만 꾸준히 노력하면서 사다리를 밟고 한걸음한걸음 올라가듯이 쉬지않고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탈무드>의 문을 열수 있는 것은 당신의 마음이며, <탈무드>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는 당신의 탁월한 두뇌와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탈무드 한글 편역자 김상구

Saturday, July 10, 2010

[유머] 즉효약

기차 여행 중이던 유태인이 소금에 절인 청어를 먹다가 남은 머리(대가리)를 종이에 싸고 있었다.
곁에 있던 폴란드인이 끼어 들었다.
"우리도 늘 청어를 즐겨 먹지만, 무엇보다도 청어 대가리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하더군요."

유태인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 머리를 사시죠?"

쌍방간에 흥정이 이루어져 폴란드인은 유태인이 먹다 남긴 청어 대가리 5개에 5즈로티를 주고 샀다. 먹기 힘든 5마리의 청어 대가리를 다 골라목고 난 폴란트인은 짜증스럽게 말하였다.

"당신은 정말 지독한 사람이군, 5즈로티면 싱싱한 청어를 5마리를 사고도 돈이 남을 것이오."

유태인이 대답했다. "그것 보시오. 당신은 벌써 머리가 좋아지지 않았소?"

[유머] 장사꾼의 유언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유태인이 병이 깊어져 운명의 시간을 맞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걱정에 싸인 식구들이 이를 지켜보았다. "여보, 당신 어디있소?"

환자의 말에 가족들은 마지막 유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귀를 기울였다.
"예, 나 여기 있어요."

환자는 식구들을 돌아가며 찾았다. "딸애는 어디 있느냐?"
"예, 아빠, 여기 있잖아요.아버지 손을 잡고 있는게 아버지 딸이예요."

그러자 환자는 안간힘을 쓰고 일어나 앉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러면 가게는 누가 보고 있단 말이냐?"

[유머] 은칠한 거울

한 학생이 랍비에게 물었다.
"랍비님, 가난한 사람들은 오히려 남을 돕는데, 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을까요?"

랍비가 말했다. "창밖을 보게, 무엇이 보이나?"

"예,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사람과 자동차가 보입니다."

"다음엔 벽에 벌린 거울을 보게."

"예, 제 얼굴밖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웃으며 말하였다.
"그렇지, 창이나 거울이나 똑같은 유리로 만들었지, 하지만 유리에 은칠을 조금만 하면 자기 얼굴밖에 볼 수가 없기 때문이야."

[유머]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

여든살이 넘은 유대인 노인이 젊은 여자를 아내로 맞았는데, 곧 아내가 임신을 하였다. 노인은 놀랍기도 한편, 이상한 생각이 들어 랍비를 찾아가 물었다.

"선생님, 이건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산을 접어든 한 사나이가 산야를 헤메다가 한 마리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사자의 공격을 받은 그 사나이는 우산대로 사자를 찌르자 사자는 힘없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지요."

"아니, 선생님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아니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 사나이 뒤에 있던 진짜 포수가 사자를 향하여 총을 쏘았으니까요."

[유머] 현명한 대답

금지된 포카 놀이를 하다가 적발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세 명의 병사가 있었다. 이들의 종교는 각기 달랐는데, 하나는 카톨릭이었고,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와 유태교인이었다.

카톨릭 병사가 대답했다.
"판사님, 성모 마리아에 맹세코 포카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프로테스탄트 병사였다.
"저역시 마틴 루터에 맹세코 포카놀이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유태인 병사가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판사님, 혼자서 하는 포카도 있습니까?"

하나님

어떤 로마인이 랍비를 찾아 와서 '당신들은 하나님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시오,' 라고 말하며 가르쳐 주면 자기도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였다.

랍비는 물론 이 심술궂은 질문을 못들은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랍비는 그 로마인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태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시오."
그러자 로마인은 태양을 잠깐 쳐다보고는 소리쳤다.
"엉터리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어떻게 태양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랍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인 태양조차 바로 볼 수가 없다면 어떻게 위대하신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겠소."

- 탈무드의 귀(하나님) 중에서 -

행복한 여행

신대원 다닐때부터 강명관 선교사를 좋아했습니다. 수많은 동기들이 있었지만, 그분의 웃음이 참 해맑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같은 서클에 있으면서 선교사적 삶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었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선교사님에게 많이 기대였습니다.

신대원 졸업후 저는 미친듯 선교단체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님과는 각기 제 길을 갔습니다. 미국에 와서 강선교사님이 브라질에 가셨다라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하여 여러번 전화를 하였지만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잖게 또다시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더욱 해맑은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번 여행이 좋았던 것은 같은 길을 가는 두사람이 운전하고 가면서 이야기 했다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보다도 좋아하는 분과 함께 같이가는 설레임을 여러분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침에는 제가 Q.T를 인도하였고, 저녁에는 선교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랬습니다. 밤마다 아이들이 피곤해 하는데에도 불구하고, 기도제목 하나하나 내놓고 같이 기도하고, 소감 발표하게 하고, 그 못부르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찬양을 인도하는데, 정말 혼났습니다. 제가 나중에 강선교사님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여행가면 매일 이러니?” 라고 묻자 “오늘은 그래도 목사님 가족배려해서 일찍 끝난거에요”라고 말하더라구요. 사실 아이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은 정글에서 왔기 때문에 또다른 자연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에게 또 다른 시골을 보여주면서 “괜찮지?”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 인것입니다. 아이들은 그랜드캐년이 아마존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즐기고 노력하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철없이 노는 예준이, 그리고 예슬이 언니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예림이(사실 둘은 자매라고 느낄 정도로 비슷합니다) 그리고 사모님과 우리 집사람...

목사들은 만나면 교회이야기만 합니다. 다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게 됩니다. 천성인가 봅니다. 교회이야기 하고, 비젼이야기 하고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갑니다. 3년 전에 구역에 대한 비젼을 나누었고, 2년 전에 Q.T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번에도 저의 목회에 실제적 도움이 될만한 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좋은 사람과의 여행은 참 행복합니다. 영육이 회복되는 것들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못 부르는 아이들과 함께 반복하여 불렀던 “신자 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신학교에서 설교시간에 들었던 이야기 “목사가 되기 전에 신자가 되라 신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되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즐거운 여행을 마쳤습니다

(2009년 9월 21일, 오렌지카운티 한인연합교회 김인철 목사)

[QT] 동참의 댓가 (7/11/10)

[고린도후서 11:22-33]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린도후서 11:28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획기적인 기록영화를 제작하면서 영화제작자 켄 번스와 그의 동료들은 군사기록 필름을 수천시간 동안 보아야 했습니다. 펠릴리우 전투의 충격적인 장면들이 밤에 자주 그들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번스는 「새크라멘토 비」신문의 기자인 릭 쿠쉬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표현하기 거의 불가능하지만 과거로부터 유령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감정의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술이든 영적이든 다른 이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에는 댓가가 따릅니다. 바울도 복음전파 사역을 하는 중에 이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 11:28-29).

오스왈드 챔버스는 우리가 “다른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고자 할 때,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에게 이러한 고난 가운데서도 훌륭하게 우리를 지킬 능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 이런 영적 고난을 받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우리가 약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진다는 것(고후 12:9)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기에,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눌 때 주님은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십니다.


나 비록 약할지라도 오늘 섬길 수 있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를 수 있네
적진에 있든 전투 중에 있든
예수님의 강함으로 대적할 수 있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제공하신다.


고린도후서 11:22-33

[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유머] 지옥에 갈 사람은

어떤 농촌교회에 가장 오래된 집사 한 사람 때문에 골치를 앓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설교시간만 되면 잠에 곯아떨어지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늙은 박 집사님을 어떻게 좀 할 수 없어요? 그냥 놓아두면 다른 교인들이 시험 들겠어요. " 걱정스러운 얼굴로 목사 부인이 남편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다음 주일, 목사님은 강단에 올라가 설교를 시작했고, 그 박 집사는 여느 때처럼 또 잠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자,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모두 일어나세요."라고 조용히 말씀했습니다.
박 집사를 빼놓고는 모두 일어섰습니다. "자, 모두 앉으세요. 이번에는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은 다 일어나세요."라고 말씀했는데, 조용조용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 "일어나세요"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박 집사는 앞의 말은 듣지도 못하고 자다가 "일어나세요."란 말만 듣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박 집사는 설교시간에 두 번 다시 졸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머] 진품명품에 황당한 일

어떤 한 남자가 고대물건의 가치를 가리는 TV 프로그램 <진품명품>에 출연을 했다.
그는 자신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문서를 들고 나와서는 자랑을 했다.
그런데 감정한 결과는 이렇게 나왔다.
“노비문서입니다

안식일이 우리를 지킵니다

[예레미아 17:19-27]

예수 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의 차이가 겉으로 드러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주일 성수’입니다. 주일을 바르게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 성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인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렘 17:19-20]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7]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렘17:21-22]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마 12:19-13]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네겝으로부터 와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오려니와 [렘 17:24-26]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시 58:13-14]

주일성수는우리의몫이지만그 주일 성수가 실제로는 우리를 지킵니다. 주일 성수는 하나님이우리에게 축복하시는 일인것입니다.


주일 성수에 연관된 이야기들

마르바 던은 저서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마차 한 무리가 중부의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서부의 오리건으로 향했습니다. 일행은 모두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어서 안식일에 이동을 멈추고 쉬었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어서 일부 사람들은 폭설이 내리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안식일에도 계속 달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그들은 두 팀으로 나눠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쉬는 팀과 안식일에 달리는 팀으로 말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안식일에 쉰 팀이 더 일찍 오리건에 도착했습니다. 안식일에 충분히 쉰 그 활력으로 엿새 동안 더욱 힘차게 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르바 던은 이야기의 결론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명을 존중하는 자들을 존중하신다.”
인류 역사에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소련에서 공산 혁명을 성공시킨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의 생산량을 높이고자 기독교 문화의 산물인 주일 휴무를 깨뜨리고 10일 동안 일한 후에 쉬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엉망이었습니다. 아픈 사람, 병든 사람이 속출하는 바람에 시행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주일 휴무로 돌아갔습니다. 쉴 때는 쉬어야 합니다. 주님은 행복을 위해 계명을 주시고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Source: 웰빙 가정의 10가지 법칙 - 이동원 (생명의삶 2009.4)

영화 「불의 전차」는 에릭 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제8회 올림픽 경기가 파리에서 열렸을 때, 100m 선수 중 가장 좋은 기록을 가진 금메달 유망주이자 믿음 좋은 스코틀랜드 청년 ‘에릭 리들’이 경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경기 일정이 주일로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이 신실한 청년은 경기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은 조국을 배반한 자, 위선자, 옹졸한 신앙인 등으로 말하면서 분노하고, 있는 대로 폭언을 하고 비난을 했습니다. 에릭 리들은 주일을 범하면서까지 금메달을 향하여 뛸 마음은 없다며 거절하고는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온종일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 목요일에 400m 경기가 있었는데 그 경기에 나갈 선수에게 문제가 생겨서 에릭 리들이 대신 나가게 되었습니다. 100m 선수가 400m에 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기에서 에릭 리들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기자들이 어떻게 100m 경주자로서 400m를 뛸 수 있었느냐는 물었습니다. “100m는 내 힘으로 뛰었고, 나머지 300m는 하나님의 힘으로 뛰었습니다. 100m 경주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겼더니, 나머지 길은 주님께서 인도해주셨습니다.” 주일예배에 성공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주일을 성실히 지키십시오. 주님, 주일에 성도들과 함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게 하소서. 당신은 주일 예배에 성심껏 참여 합니까?

Source: 김장환 큐티365 / 나침반출판사

Friday, July 9, 2010

거듭나는 것이란?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인류 중에 그 누구도 그 분만큼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이 사랑을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든 어떤한 짓을 했던간에 그 분의 사랑은 변함 없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알기위해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신약)속 하나님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기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성경을 접하고 말씀을 통해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에 대한 이해는 성경을 읽음으로서 얻어지게 됩니다.

성경의 첫번째 부분은 구약입니다. 그러나 신약을 먼저 읽게되면 그리스도인 이란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복음"이란 "좋은 소식"을 뜻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어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씻으시기 위해 그 분을 십자가에 메달려 죽으시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를 영접한 후 거듭난 삶을 살면서 영생을 소망할 수 있게된 모든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 사(4)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직접적인 말씀을 접하고 배우는데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사실은 종교행위가 아닙니다. 성경을 일단 읽기 시작하면 예수님은 종교적 권위와 그 권위를 지니고 있는 자들의 위선적인 행위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 매우 싫어하셨고 그런 부분들을 꾸짖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이셨고 생명이셨으며 모든 선한 것의 예표이셨습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분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유일한 연결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고 그 분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생명의 진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설명하자면, 하나님은 순전하신 분입니다. 완벽하신 분 이십니다. 오직 영광스러움만이 그 분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성으로 인해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분의 영광을 바라볼 수 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느 나라 국가원수를 접견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을 가능한 한 깨끗하게하고 그사람을 만나러 갈 것입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하지만 만왕의 왕, 전능하신 우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선 죄로 더럽혀져 있는 우리의 몸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씻고 그 분 앞에 나아가기 원하셨지만 그러기위해서는 이 세상 어떤 것도 재물을 드려도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공의롭고 선한 사람이라고 외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생각뿐 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원죄 때문에 죄와 정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질 수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더러운 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더러운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그 분의 독생자이신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고 희생재물로 쓰이게 하신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며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비로서 씻겨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나타내신바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그 분의 보혈로 인해 우리가 새 생명을 얻게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것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에서 말씀하신 "거듭 난다"라는 것입니다. 거듭 나는 것에 대한 증표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어떤 이는 표현하지 못할 평안을 갖게되는 경험을 하고 또 어떤 이는 환희의 기쁨을 맛보게 되며, 어떤 이는 마음속에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강한 확신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묶여있는 해로운 중독상태에서 해방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치유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하고 난 후 지속적으로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의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연스러운 내적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우리와의 관계의 원칙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한번의 회심과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영생과 죄로부터의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을 마음 깊히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받아들이실 준비가 되있으신 분입니다.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기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우리의 입을 통해, 우리의 말로 고백을 해야합니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이시며 나는 예수님께서 살아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습니다" 라는 외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죄인으로 인정하고 예수님께서 내 죄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음을 믿고, 그 분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인정할 때, 우리는 회개의 부르짖음과 눈물을 쏟게 됩니다. 나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그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같은 죄를 다시 짖지 않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 나가면서 하나님께 나의 거듭난 마음을 바쳐드리면서 그 분께 내 삶을 의지하십시오.

다음과 같은 기도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고백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샬롬

"아버지 하나님, 저희에게 귀한 독생자를 허락하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희 죄를 씻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여 이제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믿음 없음과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진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이제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저의 구주이심을 믿고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제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울 수 있음을 믿습니다. 저의 창조주되신 하나님, 저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제 제 삶 속에 주인되시고 주관자가 되시어 저의 길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F

[QT] 잘못된 예측 (7/10/10)

[마태복음 24:36-44 ]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태복음 24:3

2009년 7월 22일에 일식이 있을 것이 라는 뉴스가 경고성 예측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은 일식이 중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 지각판이 “어긋나면서” 대형 지진을 일으키고, 그 결과 일본에 치명적인 쓰나미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지질조사국은 아직 어떤 과학자도 “큰 지진을 예측하지 못했다. 과학자들은 그런 큰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방법을 모르거니와 또 가까운 미래에 그 방법을 알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라고 대응했습니다.

주께서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재림 날짜에 대해서도 많은 억측들이 나돌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재림 날짜를 예측하려 들지 말고, “깨어서”(42절) “예비하라”(4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라고 경고했고, 덧붙여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라”(벧후 3:10-11)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딛 2:13) 기다리는 동안,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힘껏 노력하며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하십니다.

누군가가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난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해도
그 말에 속거나 잘못된 길에 빠지지 말라
아무도 그 날을 알 수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마태복음 24:36-44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Thursday, July 8, 2010

[유머] 실연

한 젊은 청년이 실연을 당했다. 이제는 살 가치도 일을 해야 할 보람도 찾지 못한 그는 이 세상을 하직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나 같은 놈이 살아 무얼 하나?
그러다가 이제까지 내가 예수를 믿음 사람으로 죽기 전에 성경이나 한 줄 읽고 죽어야겠다고 다짐하고서 성경을 펴 들었다. 그런데 아뿔싸 이게 무슨 변고인고? 하필이면 성경을 펼친 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데 유다가 나가서 목매어 죽으니라 (마27:5)는 말이었다. 어차피 나는 죽어야할 목숨인가보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성경을 펼쳤다. 거기 이런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눅10:37) 청년은 부아가 치밀었다. "이럴 수 있나? 아무리 그래도 목매어 죽으라니 그럴 수 없다. 다시 한번 찾아보자
모든 것은 삼세번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면서 성경을 폈다. 거기 이런 말씀이 있었다.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 머뭇머뭇하려느냐?

*유머는 유머일 뿐입니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는 것은 정말 위험합니다. 괜히 시험받지 마시고 항상 영안에서 기도하며 말씀의 인도를 구하세요.

[유머] 죽고 싶나요?

1) 가장 먼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말아 보세요. *배고파 죽습니다.
2) 죽지 않았다면 앞선 하루 동안 못 먹었던 음식을 쌓아 놓고 다 먹어 보세요. *배 터져 죽습니다.
3) 이것도 않되면 하루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말아 보세요. *심심해 죽습니다.
4) 그래도 안 죽으면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일에 맞서서 두 배로 일해 보세요. *힘들어 죽습니다.
5) 혹시나 안 죽으면 500원만 투자해서 즉석복권을 사세요. 그리곤 긁지 말고 바라만 보세요.
*궁금해 죽습니다.
6) 잠시 후 죽을랑 말랑 할 때 긁어 보세요. 반드시 꽝일 것입니다. *그러면 열 받아 죽습니다.
7) 그래도 죽고 싶다면 홀딱 벗고 거리로 뛰쳐 나가 보세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일수록 좋습니다. 얼어 죽기보다는 얼굴 팔려 죽습니다.

이상의 방법으로도 죽을 수 없다면 아직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남아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 인생은 하나뿐이고 그것은 곧 지나가겠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행해진 일은 영원할 것이다'

[유머] 죽은 새에 대한 의문

한 꼬마가 해변에서 놀다가 엄마에게 달려와서 엄마의 손을 끌고 해변으로 달려 갔다.
그곳에는 죽은 갈매기가 있었다.“엄마,새가 왜 이렇게 됐어?”
“음∼ 새는 죽었단다.그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갔어.” 꼬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다시 집어 던졌어?”

Wednesday, July 7, 2010

[Playlist] Contemporary Christian Music Mix (7/8/10)

[유머] 마음을 즐겁게 가집시다

한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유머 감각이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병에 걸릴 확률이 적다고 합니다. 한 백화점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좋아하는 상사 1위로 ‘인간적이며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이 꼽혔습니다. 아이들이 뉴스보다 시트콤을 좋아하는 이유는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정치인들보다 연예인들을 좋아하는 이유도 정치인들의 표정은 굳어 있지만 연예인들의 표정은 웃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사람은 자석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깁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다른 사람들의 협력과 지지를 쉽게 얻어냅니다. 그래서 그들은 리더가 되고 성공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잠언 15장 15절에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웃음이 넘치는 가정을 만듭시다. 유머는 전염성이 강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일터와 사업장에 웃음이 가득하도록 항상 주님 안에서 마음을 즐겁게 가집시다. 주님, 웃을 때 근심이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웃음 전도사가 되어봅시다.

중국 대중의 교통수단은 자전거입니다. 시장 통 근처에 사는 한 집주인은 사람들이 자기네 담장 아래 심지어 대문 어귀까지 빽빽하게 자전거를 주차시키는 바람에 불편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주인은 “자전거 주차 금지-큰 가위 그림-자전거 주차 요금제 실시-자전거 주차하면 고발 한다 등등” 별별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고심 중에 번쩍 Big-Think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 날 이후 자전거 주차는 근절되었습니다. 담벽에 쓰여진 빅씽크 문구: “여기 진열해 둔 자전거 중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가져가십시오. 물론 공짜입니다!”

[유머] 부자와나사로

주일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누가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부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대단히 호강스럽게 살았지만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고, 거지는 불쌍하게 살았지만 죽어서 천국에 갔다는 이야기를 해 준 것이다.
이 이야기를 다 해준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부자와 나사로 두 사람 중에서 어느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질문을 했다. 그러자 아주 똑똑하게 생긴 남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선생님, 저는요, 살아서는 부자같이 되고 싶고, 죽어서는 나사로 같이 되고 싶어요."

[QT] 더 좋은 것 (7/9/10)

[히브리서 11:4-7]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히브리서 11:39
히브리서 11장 초반부에 아벨이 등장하는 것이 좀 어색해 보입니다. 그는 이름이 언급된 가장 첫 번째 “조상”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거기에 언급된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죽지 않고 천국으로 갔습니다. 노아는 인류를 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민족의 시조였습니다. 이삭은 잘 알려진 족장이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최고위직에 올랐습니다. 모세는 그 위대한 출애굽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분명히 보상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믿음으로 하였고 하나님은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벨은 어떻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둘째 아들 아벨은 믿음이 있었지만, 그 믿음으로 무엇을 얻었습니까?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35-38절에 나오는, 하나님을 믿음이 항상 즉각적인 은혜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님을 깨닫게 된 자들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들은 “희롱 당하며”, “옥에 갇히고”, “톱으로 켜지는” 일 등에 직면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고맙습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은”(37절) 사람들이 되기보다는 영웅적인 아브라함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독실한 이들에게조차도 안락함과 명성이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삶 속에서 어느 정도 축복을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영광 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되는 “더 좋은 것”(40절)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계속 “믿음으로”살아갑시다.


예수님을 섬기는데 힘을 내고
주님을 사랑하는데 박차를 가하자
주님은 약속하셨네, 우리가 신실하다면
언젠가는 보상을 받으리라고

지금 예수님을 위해 행한 일들은 영원토록 보상받게 될 것이다.


히브리서 11:4-7, 32-40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QT] 탐욕을 경계하라 (7/8/10)

[출애굽기 20:1-17] 탐내지 말지니라

십계명 중 열 번째 계명은 ‘욕망’이라는 원죄와 관련이 있기에, 왜 십계명의 순서를 거꾸로 하지 않았는지 의아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와의 죄는 그저 과일 한 개를 갖고자 했던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유혹한 것처럼 그녀를 하나님처럼 되도록 해줄 것이라고 했던 지식에 대한 욕망이었습니다[창 3:5]. 하와는 이 탐욕으로 인해 나중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리신 십계명 중에서 첫 번째와 열 번째 계명을 모두 어겼습니다. [출애굽기 20:1-17]

우리가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 나머지 계명에 따르지 않는 원인들을 대부분 없앨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닌 것을 원하기 때문에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하고,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는 6일간 일해도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이유로 안식하기를 거부합니다. 또 우리가 하고 싶은 그 무엇인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재물과 인간관계라는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탐욕이 관련되지 않은 죄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탐욕이 십계명 중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탐욕이 머리와 마음속을 맴돌고 있더라도 죄를 거부하면 우리의 죄로 인하여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피할 수 있으며, 죄로 인하여 초래되는 많은 심각한 결과들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이 당신 것보다
더 좋다고 생각되어 탐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선물은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라

만족이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이미 주셨음을 깨닫는 것이다.


출애굽기 20:1-17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라
[14] 간음하지 말라
[15] 도둑질하지 말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순종보다 더 중요한 것 [신명기 28:47-48]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신명기 28:47-48]


신명기 28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은 복을 약속한 장입니다. 심지어 가축의 새끼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는다고 할 정도로 소산이 풍부해지며,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6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1절]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치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역하면 벌을 받는 조건부 하나님을 섬기는 기복 신앙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어린양의 피의 공로에 의지하여 출애굽을 했고 홍해의 물세례를 거쳤습니다. 말하자면 이미 구원 받은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구원 받은 성도가 이뤄나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이며 또 그분의 품 안에서 누릴 복락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신명기 28장을 포함한 모든 율법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일 뿐 아니라 또 그렇게 지키는 것 자체가 유익이자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글에서도 예를 든 적이 있습니다만 “조건부 복”과 “마땅히 누려야할 복”의 차이를 쉽게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공원에 11시까지 오면 바비큐를 주겠다고 하면 반드시 11시까지 도착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그러나 회사야유회를 가면서 “공원에 11시까지 오시오. 그러면 바비큐를 즐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11시까지 모였기 때문이 아니라 회사 직원이라서 바비큐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이 아파 가지 못하거나 일이 생겨 늦게 가거나 다른 공원을 찾아가면 아무리 회사직원이지만 바비큐를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 법도대로 살면 자연히 복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당연히 복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뜻을 재차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48절 이하의 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풍족하게 되었다는 것은 46절까지의 설명으로 인하면 하나님의 법도를 지켰기에, 다른 말로 순종의 결과로 복을 받은 상태입니다. 최소한도 하나님이 직접 복을 베푸셨거나 인간이 추구한 복을 허락하셨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더 이상 다른 벌을 부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감사와 경배가 따르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받은 것에 대해 고맙다고 인사하지 않으니까 괘씸해서 벌을 준 것입니까? 시쳇말로 실컷 주어 놓고는 다시 빼앗아 가는 꼴 아닙니까? 아니면 또 다시 감사와 경배가 복과 벌을 받는 조건으로 제시된 것입니까?

우선 신자가 당신의 법도를 지켜서 도덕적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미 당신의 백성이 되었기에 당신의 품 안에서 당신이 주시는 모든 은혜와 권능을 누리게 하되 그 누릴 수 있는 수단이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조건부 기복신앙은 신구약 성경의 어떤 말씀과 사건에도 결코 적용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당신의 주권적 선택과 일방적 구원이 선행된 후에 당신의 영광을 맛보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순종하여서 풍족을 누렸는데 또 다른 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무슨 뜻이 됩니까?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 가운데 순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가나안에 들어가 누려야할 하나님의 복 중에 가장 중요한 복이 따로 있는데, 바로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해 신자가 진정한 기쁨과 즐거운 마음 없이도 여호와를 섬기거나 순종하는 모습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법도를 오해하여 기복 신앙, 조건부 축복으로 지킬 수도 있지만 당신께선 절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진심으로 기꺼이 섬기지 않는 순종은 오히려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신자를 향한 궁극적인 뜻은 오직 당신을 기쁨으로 경외케 하는 것입니다. 신자더러 단순히 도덕적 생활을 하게 하거나, 또 그런 자에게 복을 주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자신을 순종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당신과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온전하게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는 수단이 순종이며, 순종의 결과로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복이며 불순종의 그것은 벌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풍족한 가운데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다 나쁠 때는 간혹 원망과 의심이 들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 나쁜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습니다. 반면에 모든 것이 좋은 것뿐일 때에 당연히 그것을 주신 하나님도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없어진다고 해도 그분이 가장 좋은가 나아가 유일한 기쁨이 되는지 진지하게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계명을 지키면 조건부로 복을 준다든지, 그 결과로 복이 보장된다든지 하면 어느 누구도 안 지킬 바보는 없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런 식으로 절대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당신께서 주권적으로 택하시고 일방적으로 구원하실 이유도 없습니다. 가만히 두어도 당신께 순종하는 백성들이 많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여 택하신 신자를 도달시키기 원하는 단계는 따로 있습니다. 풍족하게 누리고 있는 모든 복을 일순간에 포기하라고 했을 때에 기쁨으로 순종하고 그래서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좋은 것을 다 잃어버리고도 그분 한 분 만으로도 기쁨과 즐거움을 잃지 않는 자리입니다.

신자를 일부러 고생시키려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을 거쳐야만 신앙이 성숙되어진다는 영적 필요 때문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백성과 나라들 앞에 당신 자신만이 증거 되기를 원하시지 당신이 주신 복이나 벌이 증거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 일을 하도록 부름 받은, 아니 구원 받은 자가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담대한 고백과 함께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7-9]

모든 것이 나빠 보일 때에는 하나님마저 나빠 보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모든 것이 좋아 보일 때에는 하나님이 안 좋아 보일 신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바로 그 때에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신다면 순종할 수 있습니까? 혹은 당신께서 그렇게 강권적으로 몰고 가실 때에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분만 섬길 수 있습니까? 순종보다 경배를 먼저 하고 그래서 경배하기에 순종하십니까? 아니면 단지 순종하는 것으로 경배하는 표를 내십니까?

Tuesday, July 6, 2010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유일한 근거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태복음 12:7]

믿는 분들 가운데 성경을 보고 적용하는 관점이 바로 서있지 못한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대표적 예로 성경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만 파악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것이 기록될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간주하여 자기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때에 따라 적절히 참조만 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보다 더 나쁜 잘못은 “이 말씀은 누구누구가 읽어야 하는데”라고 남에게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기에게 적용시키지 않으면 말씀이 아닐 뿐 아니라 읽는 자 또한 믿는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적용함에도 잘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뜻부터 먼저 알아야 하는데, 적지 않은 믿는 분들이
그 단계는 생략하고 자기 삶에 바로 적용부터 하려듭니다. 성경이 자기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분명한 인식은 있는데 자기가 남들에게 실천해야 할 사항으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 전에 인간끼리의 관계를 먼저 세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불과 하나의 율법 내지 도덕 교과서가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보통 후반부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 하였으리라”에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그래서 남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나를 향한 뜻이므로 이제는 남들을 쉽게 판단, 비방, 정죄하지 말아야지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맙니다. 전반부인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은 모르고 있거나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선 도덕적 계명 하나를 받은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 계명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위로 나타내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먼저 세운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읽는 자녀들로부터 제사를 받으시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녀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원한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판단, 정죄 받을 일이 너무나 많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로 용서해 주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긍휼을 진정으로 체험했고 이해한다면 감히 남을 정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믿는 분들이 성결함이 없이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거룩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데에 필수적인 선결 사항입니다. 죄가 있으면 그 분의 은혜와 능력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모습이 되는 자는 결코 없습니다. 심지어 평생을 수도원에서 정진만 하는 자라할지라도 단 한 순간도 자신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된 자녀를 향한 그분의 지속적이고도 무한하며 일방적인 용서의 가능성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그 관계를 바로 세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무한항 용서이 가능함, 본문에 따르면 “그 분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한다”는 오직 한 가지 영원한 원칙을 붙드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바라 볼 때, 매순간 하나님으로부터 정죄 받아 마땅한데도 그 정죄가 유예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용서 받고 나아가 더 풍성한 은혜로 인도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하시며 그 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하실 뿐 아니라, 그 분의 일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을 실제 삶에서 체험하면서 매일 기쁨의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로 따지면 당장 죽어야 하는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고 나아가 세상 사람보다 더 풍성하고 활기찬 참 생명력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음이 바로 은혜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은혜 가운데 있게 된 이유나 조건이 우리 쪽에선 전혀 발견되지 않기에 더욱 은혜라는 거지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긍휼과 은혜로 나를 택하셨고 나를 구원하셨고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 뿐 아니라 그 긍휼이 내 평생에 함께 하시어 끊임없이 나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여, 나는 도저히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무릎 꿇습니다” 라는 한마디의 진정한 고백뿐입니다.

우리의 참된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결코 남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부터 지속적인 용서의 가능성이 없다면 한 시라도 살 수 없는 자인데 감히 남을 비방 정죄할 자격이나 권리가 있습니까? 결단코 없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있는 자는 모든 사람들이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베풀어져야 할 너무나 불쌍한 죄인으로 보게 됩니다.

불신자 시절에 갖고 있던, 그래서 남들 앞에 자랑하던 자신의 의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뭐라 해도 저 놈보다는 낫고 착하다”는 것 아닙니까? 도덕적으로 따져서 남보다는 내가 우월하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나서 생각이 어떻게 바뀝니까? 내가 천하의 죄인 중의 괴수가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남을 정죄할 수 있습니까? 남을 조금이라도 정죄한다면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은 하나님 앞에 한 거짓말이자, 그 분 앞에서도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위선입니다.

불신자 시절의 생각이 그대로 살아 있다고 쳐도 그렇습니다. 나도 하나님 앞에 매번 용서 받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놈인데, 나보다도 못한 저 사람은 얼마나 하나님의 자비가 더 필요할까라고 긍휼히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똑 같은 죄인끼리 정죄한다는 것은 너무나 말도 안 되고 웃기는 꼴입니다. 똥 묻은 개들끼리 서로 똥 묻었다고 욕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세계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정죄할 자격과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영역 안에서는 인간끼리 서로 판단하고 정죄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것을 탓할 수도 없고 탓해봐야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로는 도덕적 우월성으로 사람을 판단해선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만 모든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제사를 드리는 뜻에는 복을 받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자기 죄를 사하고자 하는 바람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따르고 또 제물의 질과 양에 따라 사해지는 죄의 종류도 달라집니다. 당연히 인간의 정성과 열심과 치성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인간의 죄를 사하는 조건이나 자격이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를 사하는 제사의 제물도 하나님이 직접 감당하셔야 속죄의 효과가 보장됩니다.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영원 유일한 수단은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속죄제가 십자가에서 이미 영단번(永單番 Once-for-all)으로 드려졌기에 이제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게 오직 자비만 바라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고 그 후 사람끼리의 관계도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은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것뿐입니다. 남을 정죄하지 않는 것이 단순히 신자의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신에 아무리 많은 허물과 잘못이 있는 자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해 가지 않고는 오히려 안타까워 견딜 수 없게 된 자가 신자입니다.

따라서 교인 중에는 두 가지 유형 밖에 없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게 된 자와 아직도 남을 정죄하는 자리에 있는 자입니다. 전자는 자신부터 날마다 그분의 무한한 용서 속에 있는 자이고 후자는 그분 앞에마저 자신의 치성과 의를 앞세우는 자입니다. 다른 말로 그분의 자비만을 구하는 교인과 그분에게 제사만 열심히 드리는 교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엔 전자만을 자녀라고 하지 후자를 두고 자녀라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심각하고 두려울 따름입니다.

[유머] 도끼 가져와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처음으로 교인 심방을 다니는 중에 어느 두 노처녀 자매가 사는 집에 도착했다. 그들이 사는 집의 정문은 비만 오면 나무로 된 빗장이 물에 불어서 열기가 힘이 들었다. 그런 까닭에 비가 오는 날 손님이 올 경우 그들은 손도끼를 가지고 문빗장을 젖혀야 했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은 비 오는 날은 뒷문을 사용해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임 목사님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목사님은 그 집의 교인 중 한 자매가 동생에게 이렇게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는 큰길로 줄행랑을 쳐야 했다.
“마르타, 신임 목산데 도끼 좀 가져와!”

[유머] 내가 숨었나이다

새로 오신 목사님이 하루는 교구 성도들을 심방하러 나섰다.
집집마다 심방을 잘 마치고 드디어 마지막 집에 이르렀다.
누군가가 집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목사님은 명함을 꺼내 뒷면에 "계시록 3장 20절"이라고 써서 문에 붙여놓고 발걸음을 돌렀다.
계시록 3장 20절 말씀은 다음과 같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그 다음 예배를 마친 목사님이 헌금봉투에서 자신의 명함을 발견하였습니다.
자신이 적어놓은 성구 아래 또 다른 성경구절이 적혀 있었다.
"창세기 3장 10절". 창세기 3장 10절 말씀은 이렇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유머] 비결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
아무 반응이 없자, 다시 물었습니다. “정말… 아무도 없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그때, 저 뒤에서 한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요청했습니다.
“할아버님,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우리에게 말씀해주세요.”

그러자 나이가 들어서 힘없는 목소리로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응, 있었는데… 다아… 죽었어.”

[QT] 진정한 자유 (7/7/10)

[갈라디아서 4:21-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 갈라디아서 5:1
1776년, 북아메리카에 있던 13개의 영국 식민지가 영국 왕이 내린 규제에 대항하여 싸운 결과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하였습니다. 이 갓 탄생한 나라는 곧이어 저 유명한 「독립선언문」을 채택하게 됩니다.

거의 2000년 전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면서 믿는 자들의 “독립선언”을 분명하게 알리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갈보리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신 예수님은 이제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라고 썼습니다. 로마서 8장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2절)라고 우리에게 확신을 줍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라”라고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가 허용하는 그 어떠한 자유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어디에 있든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은 자유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자유라네, 정죄함도 없다네!
예수께서 완전한 구원을 주신다네
“내게로 오라”시는 주님의 감미로운 부르심
그리로 가세, 주님의 한 번 구원으로 영원토록 구원을 누리리

우리의 가장 큰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갈라디아서 4:21-5:1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Source: Our Daily Bread

[유머] 수의사와 짐승

영국의 어느 장관이 의회에서 국민보건을 주제로 연설을 했다.
그때 한 의원이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장관은 수의사 출신 아니오? 수의사가 사람의 건강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떠들어대는 거요."
엄청 치졸한 인신공격이다. 모든 의원들의 시선이 연단으로 쏠린다. 그러나 장관은 의원의 급습에도 아랑곳없이 이렇게 답변했고 그 순간 의회는 온통 웃음바다로 변해버린다.
"네. 저는 수의사입니다. 혹시 어디가 편찮으시면 아무 때고 찾아오십시오."

Monday, July 5, 2010

[유머] 이브의 질투

여자들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남편들을 의심할 때가 있다.
아담이 며칠 동안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자 마음이 심란해진 이브.
"당신 다른 여자들이랑 있다가 온 거죠?"라고 이브가 따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 아담이 대답했다.
"세상에 당신 말고 여자가 어디 있다고 그래."
말다툼은 이브가 잠들었을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결국 누군가가 그의 가슴을 콕콕 찌르는 바람에 잠에서 깬 아담. 이브의 짓인 것을 보고는 "뭐하고 있는 거야?" 아담이 다그쳐 물었다.
그러자, 이브가 하는 말, "당신 갈비뼈를 세고 있어요."

[유머] 절대 잊지 않는 십계명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십계명의 순서를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외우면 잊을 수 없고 순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
일 = 일:절 나외에는 다른신을 두지 말라.
이 = 이:상한 우상을 섬기지 말라.
삼 = 삼: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
사 = 사:업을 하지 말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오 = 오:만이 아버지 (부모님)을 공경하라.
육 = 육:혈포(대포 일종 살인 무기)로 살인하지 말라.
칠 = 칠:보단장한 여인을 간음하지 말라.
팔 = 팔:로 도적질하지 말라.
구 = 구:차한 변명으로 거짖증거 하지 말라.
십 = 십:원이라도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유머] 천국에서

장로님 한 분이 죽어서 천국에 가게 되었다.
천국에 가서 보니 어느 집사님 한 명이 천국에 왔는데 아주 진수성찬에 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장로님은 혼자서 생각했다.
'그래 집사도 천국에서 그렇게 잘 대접받는데 장로인 나는 얼마나 대접을 잘 받을까?'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기에게 와서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장로님을 천사 한 명을 불러 따지기 시작했다.
"왜 나에겐 대접을 안 하는 거요" 그러자 천사가 하는 말, "장로님을 셀프서비스입니다."
장로님은 화가 남을 꾹 참고 있다가 얼마 전에 자신 보다 먼저 죽은 목사님 한 분이 생각이 나서 천사에게 그 목사님에 대해 물어 보았다. 천사가 하는 말?
"목사님은 지금 배달 나가셨습니다."

[QT] 전진을 위한 물러섬 (7/6/10)

[ 마태복음 14:13 - 14:23 ]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 마태복음 14:23
한 친구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지도자 수련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틀 동안 교회지도자들은 자신의 일들을 뒤로 미루고 기도하며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경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 친구는 새롭게 되었을 뿐 아니라 활력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번 수련회는 교역자로서 우리가 앞으로 나가는데 정말 도움이 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물러선다는 말이 좀 이상하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때로는, 의미 있는 전진을 위해 뒤로 물러서서 재충전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특히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전진을 위한 후퇴”를 실행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의 사역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신 후, 예수님은 뒤로 물러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3절은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빠른 속도로 앞서 나가기를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밀어붙이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여 자신을 지치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열망 속에서도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기꺼이 물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능력으로 기운을 새롭게 할 때만이 주님을 섬기며 앞으로 나아갈 힘의 원천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예수님께로 물러서십시오.


인생의 많은 도전에 맞서기 위해
그리고 모든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멈추고 기도하며
휴식할 시간을 가지라 말씀하시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에만
우리는 강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마태복음 14:13-23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Source: Our Daily Bread

치유와 구원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면 우리에게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요 1:12) 내 자아가 깨어지고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내 안에 있는 상처들이나 죄성이 함께 치유되고 이를 통한 얻어진 구원의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조금 복잡한 말 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구원이 온다는 것은 우리 몸속에 마음속에 영혼속에 말씀과 믿음이 뚫고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그 때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을 내가 진정으로 사모하고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그 믿음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게 됩니다. 그 믿음을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그 믿음에 따라 구하고 사모하게 될 때 우리에게 간증이 생기는 것이고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원이 우리안에서 완성이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화가 됩니다. 성스럽게 된다는 것이지요. 성스럽게 된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마치 외관상으로 그렇게 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신비로운 성경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노력을 한다고해서 절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얻은 믿음을 따라서 성령님을 구하고 사모하게 될 때 성령님이 우리안에 자리 잡으시게 됩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 2:16-20) 성령님이 우리를 성화될 수 있게 이끌어주신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16-20]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이 주시는 것 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님이 안주하시고 성령님의 이끌림에 따라 삶을 살때 성화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자체가 죄성을 타고 났기때문에 절대로 우리의 노력으로는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만하면 이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느냐? 그 것도 아닙니다. 내가 오직 주안에 있을 때, 성령의 임재안에 있을때 성화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안에 있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임재안에 있기위해서는 우리가 해야할 것 들이 있습니다. 늘 말씀을 접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찬양하고 기도를 할 때 우리는 비로서 성령님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참 힘들것 같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힘들지 모르지만 우리가 성령님 안에 있게 되면 성령님이 그렇게 인도하시고 그러는 중에 우리에게 과거에는 있지 않았던 기쁨이 찾아옵니다.

치유는 우리 안에서 성령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치유가 이루어져야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치유가 없는 마음에, 몸 안에는 성령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치유가 이루어지면 그 안에 비로서 성령님이 들어오시게 되는거지요. 그것이 성령의 임재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이 따라옵니다. 그 권능은 우리가 하나님 손에 이끌려 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구원인 것입니다.

치유는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도 계속 이루어집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죄성과 상처들은 하루 아침에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받게되는 유혹과 방해로 인해 그 치유가 멈쳐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임재해 계시면 마치 수술을 받아 아픈 곳을 치료하고 난 후에 회복기간이 필요하듯이 계속해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상처가 치유되고 마른뼈가 살아나듯 삶이 회복이 됩니다.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지요.

내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믿음을 얻은 후에 계속해서 옛 사람의 것을 버리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우리가 받은 믿음의 은혜를 다시 쏟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물론 부끄러운 구원을 얻으면 지옥에 가는 것은 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계속해서 말씀으로 기도로 찬양을 드림으로써 또는 나의 헌신을 통해서 공급받으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 분의 은혜로 우리를 더욱 풍성히 채워주시며, 그를 통해서 성령의 임재안에 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로움이 찾아오게 되고구원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샬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영혼과 온몸과 지성과 이성까지도 구원을 받아야지만 온전한 평강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도 바울이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삶이 새롭게 변했는지를 간증한 것 처럼(행 22,26장).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족한 소견으로 쓴 글이 질문하신 것에 대한 답변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Sunday, July 4, 2010

[유머] 아담의 착각

하루는 하나님이 아담과 같이 걸어가다가, 아담에게 물었다.
"하와가 맘에 드느냐?" 아담이 물었다. "그럼요, 하와의 피부는 어쩜 그렇게 부드럽죠?"
"그래야 네가 하와를 사랑할 것 아니냐?" 아담이 또 물었다. "하와의 몸매는 어쩜 그렇게 아름답죠?"
하나님이 대답하길, "그래야 네가 하와를 사랑할 것 아니냐?"
아담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렇지만 하와는 어떻게 그렇게 멍청한 거죠?"
"몰라서 묻니? 멍청해야 하와가 널 사랑할 수 있을 것 아니냐?"

[유머] 욕을 해학으로 이기는 길

설교자에게는 설교 전에 종종 마음을 상하게 하는 공격성 글을 받을 때가 있다.
D.L. 무디가 설교 전에 기도를 하고 있었다. 눈을 뜨고 보니, 쪽지가 하나 올라왔다.
광고인가 하고 보았더니, '바보' 라고 쓰인 쪽지였다.
미국 사람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가? 속이 상하고, 화가 날 법하다.
그리고 그 쪽지를 보낸 사람은 지금 얼마나 즐기고 있을까?
그 때 무디가 청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누가 제게 광고를 전달하셨군요. 그런데 이상하게 '내용' 은 없고, '이름' 만 써있네요!"

[유머] 개 같은 목사

개와 오래 생활하다 보면 개의 사람 친화적인 것에 놀랍니다. 방 안에서 왔다 갔다 난리치다가도 주인 품안에 안기면 금방 편안히 잠드는 것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납니다.
종일 주인이 외출하여 있을 때 풀이 죽어 구석에 쳐 박혀 있다가도 주인이 돌아오면 반가워 미칠 듯이 달려듭니다. 사람 같으면 토라져서 달래는데 몇 시간 걸릴 텐데요.
보신탕을 끓여 먹으려고 기르던 개를 나무에 매달아 개 패듯이 패다 개가 줄을 끊고 도망갔습니다. 주인이 집에 돌아가 보니 도망간 개가 집에 먼저 와서 주인보고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목사님이 개의 충성심에 충격을 받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나도 이 개 같은 목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찬양] 내 눈물로 말할 수 있죠 - 남궁송옥

[찬양] 나를 통하여 - 남궁송옥



영상 : 전체인구가 불과 100여 명 밖에 되지 않는 전세계에서 가장 작은 부족 중 하나인 바나와 원시부족과 생활을 하면서 아마존 오지에서 선교사로서 살고 있는 강명관 선교사님 부부의 삶의 이야기

[QT] 달팽이 속도로 7/5/10

[ 로마서 5:1 - 5:5 ]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로마서 5:3-4

내 어린 시절의 가장 오래된 기억 중의 하나는 우리 집 뒤뜰 꽃밭에서 달팽이를 보았던 것입니다. 나는 등껍질이 있고, 끈적끈적한 조그만 배와 잠망경같이 돌릴 수 있는 아주 작은 눈을 가진 이 작은 생물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상해 보였던 것은 달팽이가 너무도 천천히 움직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달팽이는 얼마나 천천히 움직일까요? 어떤 연구에 의하면 달팽이는 시간당 12미터를 간다고 합니다. “느리다”라는 것을 표현할 때 ‘달팽이 같이 움직인다.’라고 하는 말이 전혀 엉뚱한 말은 아닙니다.

달팽이는 “굼뜨게” 움직이기는 하지만, 참고 견디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19세기의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달팽이는 참고 견딤으로 방주에 도착했다”라고 반어적으로 서술했습니다.

바울사도에 의하면 인내는 우리가 함양해야 할 중요한 성품 중하나입니다. 그는 “환난은 인내를 낳으며”(롬 5:3),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단과 소망을 이룬다고 설명합니다(4절). “인내”라고 번역된 단어의 헬라어는 원래 “확고부동함, 지속적임, 참음”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많은 고통스러운 시련 속에서도 믿음의 행보를 지속했던 신자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좌절이 당신을 달팽이 같은 속도로 처지게 합니까? 힘을 내십시오. 하나님은 빨리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인내하며 나아가기를 기대하십니다.


시련이 우리의 삶을 방해하며 늦출 때
쉽게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
인내함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니
오직 끈기 있게 나아가라, 예수님과 함께 승리하리라

큰 인내 없이는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없다.

로마서 5:1-5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Source: Our Daily Bread

Saturday, July 3, 2010

Contemporary Christian Music Mix (July 7, 2010)



1. Shout to the Lord - Darlene Zchech & Hillsong
2. Worthy is the Lamb - Darlene Zchech & Hillsong
3. I will run to you - Darlene Zchech
4. Here I am to Worship - Darlene Zchech
5. It is You - Hillsong
6. To You - Hillsong
7. Exceeding Joy - Hillsong
8. None but Jesus - Hillsong United
9. Hosanna - Brooke Fraser Ligertwood & Hillsong
10. Lord of Lords - Hillsong / Hillsong Conference 2008
11. Heart of Worship - Michael W. Smith
12. Lord I Give You My Heart - Michael W. Smith
13. Draw Me Close to You - Michael W. Smith
14. In Christ Alone - Keith & Kristyn Getty
15. Held - Natalie Grant
16. How Great Thou Art - Carrie Underwood

Contemporary Christian Music Mix (July 4, 2010)



1.  The Time Has Come - Hillsong United
2.  Break Free - Hillsong United
3.  Solution - Hillsong United
4.  King Of Majesty - Hillsong featuring Marty Simpson
5.  Yahweh - U2 (Live From Chicago)
6.  The Deep of Your Grace - Hillsong
7.  For Who You Are - Hillsong
8.  Oceans Will Part - Hillsong
9.  Here In My Life - Hillsong United
10.This is Our God - Hillsong
11.You Are My Strength - Hillsong United
12. How Great is our God - Hillsong
13. Awesome God - Hillsong & Michael W. Smith
14. From The Inside Out  - Hillsong
15. Adonai - Hillsong
16. For Your Name - Hillsong featuring Jad Gillies
17. Forever - Hillsong
18. Lord I Lift Your Name On High - Sonicflood

Contemporary Christian Music Mix (July 3, 2010)



1. Jesus Messiah - Chris Tomlin
2. Indescribable - Chris Tomlin
3. Hosanna - Brooke Fraser & Hillsong United
4. He is Lord - Hillsong United
5. You alone are God - Hillsong
6. We The Redeemed - Hillsong
7. At the Cross - Hillsong
8. Soon - Brooke Fraser
9. Agnus Dei - Michael Smith
10. Above All - Michael Smith
11. Awsome God - Michael Smith
12. A New Halleluja - Michael Smith
13. God of this City - Christ Tomlin
14. And Now My Life Song Sings - Casting Crowns
15. More to See - Hillsong
16. I Could Sing Of Your Love Forever - Hillsong
17. It's Your Love - Hillsong
18. Age to Age - Brooke Fraser & Hillsong
19. In Christ Alone -Brian Littrell

[QT] 그 이름을 몸에 지니고 (7/3/10)

[ 사도행전 11:19 - 11:26 ]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사도행전 11:26
한스 가이거, 마리 퀴리, 루돌프 디젤, 사무엘 모르스, 루이스 브라유,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중요한 것을 발명하거나 발견하였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인류의 삶에 커다란 공헌을 한 325가지 혁신”을 나열하고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위대한 발명”편에 다른 이들과 함께 실려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몸에 지니고 살아갑니다. 누가는 초대교회에 대해서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6)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초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벧전 4:16)으로 고난 받음을 부끄러워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한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말이었지만, 결국 영광의 상징이요, 주님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오클랜드 대학에서 고전학과 과장을 지낸 E. M. 블레익록은 1세기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한 사람, 즉 메시아(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 합당한말이다... 현대에도 그 말을 제대로 사용할 때에는 그때와 똑같은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 말이 내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도 기꺼이 주님의 이름을 우리의 구주요, 주님이요, 또한 친구로 간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보일까?
무엇이 그들의 삶을 다르게 할까?
그들은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인데

이름 뿐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라.

사도행전 11:19-26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Source: Our Daily Bread

Friday, July 2, 2010

[유머] 지혜와 유머

어떤 친구가 생선가게에서 조기를 사려고 싱싱한 것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조기 한 마리를 손에 들고 냄새를 맡자, 생선가게 주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왜 멀쩡한 고기를 가지고 냄새를 맡고 야단이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냄새를 맡는 것이 아니라 귓속말로 바다 소식을 좀 물어봤소.”
주인도 호기심이 생겨서 “그래 조기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이 친구는 대답하기를 “바다를 떠난 지 벌써 일주일이 넘어서 최근 소식은 알 수 없답니다.”
이것이 지혜요, 유머입니다.
“생선이 썩었다”라고 정면에서 쏘아붙이지 않고, 부드러운 웃음으로 넘기는 이런 재치와 유머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됩시다.
주님, 지혜와 유머가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당신이 가는 곳에 웃음이 있습니까?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유머] 헌금정신

가게를 차린 40대 남자가 장사가 되지 않자. 간절히 기도 드렸다.
"월수입이 천만원이 되면 200만원을 헌금하겠습니다."
다음달부터 갑자기 장사가 잘 되어 그는 800만을 벌었다.
그러자 사나이는 하나님께 다시 기도를 드렸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나님. 먼저 당신의 몫을 떼어놓고 주시다니".

[유머] 워매, 아직도 안 읽었다고 예?

14.워매, 아직도 안 읽었다고 예?



평소에 좀 잘난 척 하는 집사가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예~ 요즘 베스트셀러인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읽어보셨어예~?"
"아니~ 아직 못 읽어 봤는데요"
"아직도 못 보셨어예? 그거 나온지 1년도 넘었는데예~ 그 책 안 읽은 사람 없어예. 워매 우리 목사님 클났네"
그러자 목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혹시 욥기 읽어보았습니까?"
"아니요 아직 못 읽었어예. 무슨 책입니꺼?"
"그래요? 아직도 못 읽었다구요? 그거 나온지 2500년이 훨씬 넘었는데요! 집사님이 들고 계신 그 성경책 안에 있습니다."

[유머] 사모님을 기절시킨 이메일

강원도에 사는 사업가 김씨가 부산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아내에게 이메일을 썼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아내의 이메일 주소를 잘못 쳐서 메일이 엉뚱하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목사님의 사모님에게 발송되고 말았다.
목사님 사모님은 이메일을 받아 읽고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회복하고 나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메일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써 있었다.
"여보, 무사히 도착했소. 그런데 이 아래는 정말이지 무척 뜨겁구려."

[QT] 걱정목록 (7/2/10)

[ 마태복음 6:25 - 6:34 ]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34

점심시간에 나무그늘에 세워 놓은 차 안에 앉아 몇 가지 일들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울새 한 마리가 큰 벌레를 대롱대롱 입에 물고 차창 가까이에 있는 가지에 내려앉아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 새는 마태복음 6:25-26에 나오는 “목숨을 위하여...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떠오르게 했습니다.

여러 해 전 덴버신학교에서 발행하는 「초점」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기사에서 폴 보든은 걱정 많은 사람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먼저 걱정거리 목록을 작성하십시오. 청구서, 직장, 자녀 또는 손자손녀, 건강, 장래일 등 당신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적어 내려가십시오.

다음에는 걱정목록을 기도목록으로 바꾸십시오. 여러분이 걱정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드리고, 그분께 맡기십시오.

그 다음에는 기도목록을 실행목록으로 바꾸십시오. 만일 걱정거리 에 대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보십시오. 보든은 걱정을 기도와 행동으로 바꾸면 “무력하게 만드는 근심이 삶에 대한 책임감으로 바뀔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바로 당신의 걱정목록을 작성해보시기 바랍니다.

미래에 대해 초조해하지 말라
걱정거리에 휘말리지 말라
그 대신 모든 걱정거리를 모아
그것들을 기도제목으로 삼으라!

기도제목으로 정한 것은 더 이상 걱정거리가 아니다.

마태복음 6:25-34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Source: Our Daily Bread

Contemporary Christian Music Mix (July 2, 2010)



1. This Kingdom (Hillsong & Darlene Zchech)
2. Hosanna (Brooke Fraser & Hillsong United)
3. How Great is Our God (Chris Tomlin)
4. I will Exalt You (Brooke Fraser & Hillsong United)
5. Lord of Lords (Brooke Fraser & Hillsong United)
6. Soon (Brooke Fraser & Hillsong United)
7. El Shaddai (Amy Grant)
8. Faithful (Brooke Fraser)
9. Without You (Brooke Fraser)
10. Scarlet (Brooke Fraser)
11. Albertine (Brooke Fraser)
12. This Kingdom (Alternative version - Darlene Zchech & Hillsong)

Thursday, July 1, 2010

칼빈의 생애와 사상

I. 서론

칼빈은 루터와 츠빙글리에 비하여 제2세대 종교개혁자라 칭한다. 루터(1483)와 츠빙글리(1484)가 15세기 말 태어난 인물인데 반하여, 칼빈은 16세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루터가 독창적이고 대담하고 창조적이며 진취적인 개혁가였다면, 칼빈은 개혁사상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이다. 칼빈은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 출생.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 ·경리 등으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1523~15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註解)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533년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다.

그는 이른바 '돌연한 회심(回心)'에 의해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 즉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15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G.파렐에게서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다.



II. 본론

 1. 칼빈의 생애

(1) 성장과 회심

존 칼빈은 프랑스 피칼디 주 노용시에서 1509에 출생하였는데 그곳은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60마일 되는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녀들에 대하여 사소한 일이라도 예사로 생각하지 않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이 아버지 (제넬코반)에게서 지식욕과 조직전 두뇌를 물려 받았고, 어미니 쟌느 르 푸랑에게서는 경건을 배웠다. 그의 가정은 사회적 부와 지위를 함께 가졌었고, 칼빈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법률가였지만 자신의 아들을 처음에는 신부로 만들 생각으로 칼빈이 12세 되었을때 그의 생활비에 넉넉할 만큼의 수입이 있는 교회사 직분에 붙여 주었다. 칼빈은 교직을 목표로 훈련받았고, 학교에서는 조수의 일도 보았다. 1523년 14살때에 칼빈은 멀리 유학을 떠났다. 그는 귀족 몬모르와 젠리의 자제들과 함께 라 마르슈 (La Marche) 대학에 입학 하였다. 당시 라 마르슈 대학은 프랑스 인문주의 신문화의 본산이며, 국왕 프랑소아 1세의 교육제도의 중앙 집권정책에 따라서 견실하게 발전하던 곳이었다. 칼빈은 이 학에서 교수 코디(MaturinCordier)에게 라틴어를 배웠고 이것은 다른 개혁자들보다 훨씬 나은 라틴어를 쓸 수 있게 되었 던 것이다.

칼빈은 그해 몬테그(Montaigue) 대학으로 옮겼다. 이것도 아마 그의 아버지의 지시에 의한것으로 보이는데 더 교회적인 분위기를 가진 곳에서 교직을 목표로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함 같다. 칼빈은 이곳에서 우선 철학을 4년간 전공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527년 그의 아버지의 심경의 변화로 그는 오를레안(Orlean) 대학에서 법학을 배우게 되었다. 이것은 아들로 하여금 좀 더 명예로운 생애를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그는 볼슈(Bourges) 대학에서 공부한 결과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31년 그의 아버지의 세상을 떠나자 칼빈은 법률에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고전을 연구하였다. 그는 법률가 보다는 문필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칼빈은 이곳에서 "세네카의 관용론"에 관한 주설을 출판하여 학계에 데뷰하였다.

1523년 그는 갑작스런 회개를 경험하였다. 칼빈 자신의 말에 의하면 "너무나 완고하게 이 로마교의 미신에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에 그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러운 회개를 통하여 마음이 완악하기로는 누구보다도 더 강하였던 나의 모든 생애를 정복하여 복음을 가르치는 마음이 불붙게 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John Cclvin :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Grand Rapids, Michigan, 1949. P.XL) 라는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되었고, 이기적 자기 추구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발전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 칼빈은 1533년 프랑스 곧 제네바 종교개혁 운동의 선도자로서의 길을 닦기 위해 파기에 있는 프로테스탄트들로 구성된 작은 단체에 가입했는데 그곳에서 얼마 안되는 지도자가 되어 회원들을 가르치고 설교도 하게 되었다.

(2) 회심 그 이후

칼빈은 1535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스트라스버그(strassburg)로 가서 다시 스위스의 바젤로 가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경건한 호구라인 부인댁에 투숙하게 되었고, 그 집에서 1536년 그의 불후의 걸작인 "기독교 강요" 제 1판을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동기는 당시 프랑스의 신교도 박해가 있었고 그 박해의 잘못을 시정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칼빈의 나이는 26세였고, 이 기독교 강요는 사도신경을 줄거리로 하고 모든 성경에 기초하고 있었다.

1535년 제네바에서는 천주교에 치명적인 두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로마 카톨릭의 한 여자가 신교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을 독살하려다가 발각된 사건과 신구교 공개 신학 토론회에서 신교측의 승리였다. 그래서 사실상 제네바는 신교 도시로 바뀌고 있었다. 이때 지도자는 화렐이었다. 화렐은 밤에 칼빈에게 찾아가서 개혁 운동의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칼빈은 자신의 성격과 안맞을 뿐더러 경혐도 없어 거절하려 했으나 화렐이 "그대가 만약 하나님의 일보다 고요한 생활로 독서나 즐기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를 저주하리라" 는 말을 했고, 칼빈은 이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느끼고 제네바 개혁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1536년 10월 1일 로잔에서 열린 성찬 문제로 신.구교파 사이에 토론회가 열렸는데 칼빈은 교부신학을 자유로이 인용하면서 로마 천주교의 잘못을 밝혔고 결국 토론회는 신교의 승리로 끝났다. 그 후 1538년부터 1542년 3년간 칼빈은 스트라스불그에서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그의 사상은 더 넓어지고 깊어졌으며, 결실을 많이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멜랑톤과 일생동안 깊은 우정을 맺었고 루터를 존경하였다. 칼빈은 스트라불그에서 있는 동안 교훈하며 설교하였고, 또한 목회를 했을 뿐 아니라 저술도 많이 하였다. 칼빈은 이때 그리스도교 강요 제2판을 내고 로마서 주석과 성찬에 관한 통속적인 논문이란 책도 썼다. 1540년 한 과부와 결혼하였는데 9년동안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많은 내조를 받다가 1549년 그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2. 칼빈의 신학사상

(1).칼빈 신학의 출발점

칼빈 신학이라고 하면 칼빈이 가르친 신학이라기 보다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 가진 생할부면에 나타난 통일된 세계관으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하지만 칼빈신학을 이해하는데는 무엇보다도 그의 기독교 강요를 쓴 내적 필연성과 그것으로 목적한 바를 알면 된다. 칼빈신학의 문제는 형식 구성이나 사상 연관의 내용적 요소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 사상의 형식이나 내용적 사상 요목은 그 깊은 곳에 있는 연관성을 지시하는 데 그친다. 따라서 그의 신학의 출발점은 그의 회심이 가져온 하나님의 체험에 있었다. 칼홀이 말한 것처럼 "회심의 순간이 그의 전 생애의 진로를 결정했다. 그는 그때이래 루터가 언제나 되돌아간 내적 투쟁에 봉착함이 없는 것처럼 외길로 그 얻은 것의 전개에 돌진하였다." 칼빈의 회심은 이점에서 특징적이며 그것이 그의 신학 사고를 결정지어 주었다. 칼빈의 회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에 억압된 것인 동시에 그를 성서에 복종시킴으로 성립되었다. 칼빈 자신은 자신의 회심을 무가치한 자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었고 이것으로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힘은 증명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저항할 수 없는 힘은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나 의와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칼빈의 신학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이 저항하는 자까지도 복종시킬 만한 힘으로 나타나는 은총의 사실이며 이 신학을 특징짓는 것은 회심에서의 '힘'의 감각이었고 하나님을 능력자로 체험하는 것이었다.(2).신인식

신인식의 문제가 인간에게 본질적인 문제임을 칼빈은 지적하는데 그는 "신인식의 문제는 인간들이 마땅히 일생을 바쳐 탐구해야 할 주제" 라고 말하고 있다. 칼빈이 주도한 제네바교회 신앙문답 제1문에서는 "인생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일"이라고 했고 제3문 에서는 "인간 최고 행복도 신인식" 이라고 했다. 칼빈은 하나님 의식을 특별히 강조하여 그의 모든 사고와 일상생활의 대소 문제에 있어서까지도 하나님의 생각에서 조금도 떠날 수 없었다. 따라서 칼빈의 신인식은 불가피하게 인간 실존의 자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고 이 신인식은 창조자로서의 참되신 하나님 인식으로 이끌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즉 칼빈은 신인식을 어디까지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보았고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령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지식으로 확신했다. 따라서 칼빈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믿음과 일치 대응되는 사상임이 틀림없다. 그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존재 인식이 아니라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으므로 냉담한 사변은 그것을 엿보지 못한다고 보았다. 참된 하나님 인식은 단지 그의 존재를 아는 것 뿐이 아니고 그의 영광도 알고 그에게 대하여 경외의 있어서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생긴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본질은 계시에 의하여 알려지고 계시는 사람의 유한한 이해력에 적응시켜 진다. 즉 하나님의 본질은 사람에 접하면 사람을 죽게 하므로 피조물에 나타나는 것은 그의 영광으로 하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계시의 간접성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을 탐지할 수 없는 높이에서 찾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한도 안에서 인식하라고 주장하였다. 즉 칼빈은 신인식에 있어서 피조물로나 죄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한계를 지었다.

칼빈은 신인식의 원천으로서 창조와 성서를 병립시키며 사람의 본래 마음에는 그것이 타락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씨가 잔존한다고 하여 자연에서 신인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의 기술을 보면 강요 1:2:1에 아담이 순결했더라면 하는 전제도 말했고 종교의 씨는 더러운 미신에, 더러는 의도적인 악행에 기울어지고 열매 맺을 만큼 성숙함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했고 자연적 신인식이란 사람으로변명하지 못하게 하는 것 뿐이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인식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즉 칼빈은 부패한 인간에게 관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상숭배와 모든 미신의 무서운 원천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자연은 신인식의 원천으로서는 불완전한 것이고 오직 성서만이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3).성서론

칼빈은 열광적 영감주의자가 성서 본문을 떠나서 임의의 때와 곳에서 받는 일시적 감명으로 진리 판단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칼빈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있게 우리에게 파악되는 것은 성령의 내적 증거로 된다고 했다. 즉 성서의 으뜸이 되는 증거는 말씀하시는 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또 성서의 말씀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신이 어디에서 오느냐 함을 설명하기를 " 만일 우리가 양심의 참된 관심을 의논컨대 -저희가 심적 동요를 받지 않기 위하여- 또 영속적 의심의 주제를 의논컨대 -저희가 적은 일에 주저 않기 위해서-이 확신을 인간의이성이나 판단이나 추측보다 높은 원천에서 구해야 하는 데 곧 성령의 숨은 증거에서 얻은 것이다."고 하였다. 이 구는 강요 제2판(1541년)에 처음 있는 그대로 실려있고 그 이후 성서의 권위가 항상 제 1원리로 강조 되었다.

칼빈은 성령의 내증을 설명하면서 이 원리는 결코 주관주의가 아닌 성서 본문의 자증력과 그 명료성을 전제로 하고 그 저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시던 성령이 그 문자에 기계적으로 구속 받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독자에게 다시 인격적으로 임하여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이 성경의 권위의 소재를 성령에 두는 것으로 성서 자체가 성스러운 영감받은 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합리적인 증거도 열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의 권위를 받든다고 하여 똑같은 해석을 하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경건히 또는 열심히 존경과 바른 마음으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종종 의견을 서로 달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종들로 하여금 그들이 모든일의 완전하고 충분한 지식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들로 겸손하게 하며 인간이 성서의 진리를 찾아냄에 있어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하기를 권면했던 것이다.

(4).삼위 일체론

칼빈은 전통적인 표현 "인격"이란 술어를 독특한 말 SUBSISTANCE, 즉 존재 양태, 현실 존재로 대치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칼빈은 SUBSISTANCE라고 부른것은 개별적 현실 존재성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요한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 곧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동질성과 개별적인 존재와 특성을 각 인간이 지속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다른 존재 양태에서 관계되어 있으면서 도히려 혼동될 수 없는 특성으로 서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서적 계시에 의한 하나님은 자기를 하나라고 선언하면서 명확한 구별로 세 인격으로 생각하도록 제시하였다고 했다. 이어서 이것을 이행하지 않고는 우리는 참 하나님의 사상이 없고 우리의 머리중에 부동하는 하나님의 공허한 이름만을 가지게 된다고 하여 삼위일체는 신관의 본질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세 인격의 본성은 개별적인 검토에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나치안의 그레고리의 말과 같이 세 인격의 동시조명에서 비로소 한 인격이 이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터틀리안의 말을 인용해서 한 하나님이 계시지만 오히려 배경과 질서에서 그의 말씀이 있다는 것과 본질의 통일에서 한 하나님이 있으나 이 통일이 신비스런 배경으로 삼위에 배정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셋이 있음은 상태로가 아니라 형태에서, 권능에서가 아니라 질서에서 된다고 하였다.터툴리안의 이 세가지 인격의 차이에 대하여 많은 공격이 있으므로 그는 이를 변호하여아들이 아버지 다음 간다고 주장했으나 그는 이것을 인격의 구분에만 적용한 것이지 본질에서는 그런것이 아니라고 했다.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의 특성은 구분되고 부자, 성령이 영원하고 성부에게도 지혜나 권능이 결여되지 않으므로 시간적인 선행 후행을 말할 수는 없으나 질서가 존재 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칼빈은 하나님은 세가지 본체가 있고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양성(신성, 인성)의 완전함을 주장하였다.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하늘을 떠나지 않고서 자의로 처녀의 태중에 계시며 지상을 다니시며 편만하셨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칼빈은 성부와 성자에 관한 이러한 이론을 성령에도 동일하게 적용했는데 왜냐하면 성령을 성부, 성자와 구분이 된 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삼위일체와 위라는 말이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한 실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체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있는 특성에 의하여 구분된다고 보았다. 즉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이 본질에 있어서 일치하며 고유성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관계에서 일치하며 그 행동양식에 있어서도 일치함을 설명함으로써 고대 교회로부터 교회신학이 정립하고 인정한 삼위일체의 한 위로서의 성령의 신격과 그 관계와 행동에 있어서 오류가 없음을 성서상의 증거를 들어 믿고 승인하였다.

(5).성령론

칼빈은 성서에 나타난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하였고 고대 교회 교부들이 인정하고 있는 성령의 신격을 인정하고그 어휘를 사용하였다. 칼빈은 성서의 증거들을 들어서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의심없이 믿고 해명했는데 기독교 강요 제3권에서 성령을 삼위일체의 체계 안에서 성서가 증거하는 성렬이 하나님이심을 해명하고 있다. 그가 '성령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믿고 승인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었는데 첫째, 성령이 사용된 이름이 신이심을 증명한다. 성자가 인격적 존재 이기 때문에 예수(마1:21,25)라는 이름을 가진 것처럼 성령도 인격적 존재 이기때문에 보혜사(요16:7)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였을 때 베드로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라고 책망하였다. 둘째,하나님의 속성이 성령에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즉 영원성(히9:15), 전지성(고전2:10-11), 편재성(시 139:7-8), 생명과 진리의 영(롬8:20, 요16:13)등을 거론하고 있다. 셋째, 성령 훼방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가 용서 받지 못하듯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도 용서르 받지 못한다. (마13:31-32) 네째, 여러가지 은혜를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고전 12:4-11)마지막으로 마태복음 28:19절을 인용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이니 되리라" 에서 이름이 단수로 사용됨에 따라 삼위가 한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칼빈은 성령 하나님이 어떤 현상적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지만 성경에서 여러가지 현상적인 제목을 붙여서 이름을 불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성령을 양자의 영 (SPIRIT A DOPTION), 보증과 인(THE GARANTEE AND SEAL), 물(WATER), 불(FIRE), 생명(LIFE), 기름과 기름부음(OIL AND ANONTING), 샘물(SPRING), 주의 손(HAND OF LORD)등으로 표현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성령을 삼위일체의 한 위로서의 성령으로 보았고, 아버지와 아들의영으로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하여 일하시는 인격적인 영이라고 하였다.

(6). 칭의와 성화

a. 칭의

칭의란 성경에서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는다"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서 칭의라고 한다. 칭의라는 말이 구약에서는 "체다카"란 말로 사용되었고, 신약에서는 "디카이오수네"란 말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믿음과 칭의라는 말이 병용되어 사용되고 있는 데 이것은 구원을 양면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행위에 의해서는 바르다는 증거를 받을 수 없는 죄인이지만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의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에는 신앙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인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이 칭의는 상속이 아니고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다.16) 그래서 칼빈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재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이 사면은 우리 자신의 무죄가 확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였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라고 말하였다. 즉 칼빈은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은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의롭다함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 것으로 해석 하였다.

b. 성화

칼빈에 의하면 칭의가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처럼 성화도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로 칭의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되어지고 성화는 보내주신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조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는 우리를 세상과 분리시키고 영원한 유업의 소망을 갖도록 하시기 위하여 어떤 특별한 방식을 따라 성령과 함께 오셨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그는 성화의 영(SPIRIT OF SANCTIFICATION)이라 불리다고 보았다.

(7). 인간의 타락

칼빈의 인간 타락이전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형사에 관하여 사람의 구성요소 가운데 동물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안의 모든 동물에 뛰어난 요소에까지 미친다. 따라서 이 말은 아담의 지성이 명확하고 감정이 이성에 복종하고 그의 모든 감성이 잘 조절되고 자기가 가진 모든 훌륭한 것은 조물주가 주시는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던 그때에 아담에게 주어진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하였다.이어서 칼빈은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장소에 있었고 진정으로 이은사를 가지고 평화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는 두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는데 그는 불행히도 옳지 않은 부분을 택했으므로 타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칼빈은 원죄의 성격이 부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더 적극성을 띤 아담의 행동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원죄를 설명하는 용어는 교만이라든가 아니면 불순종, 배신, 변절, 범법과 같은 적극성을 띤 용어가 많은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아담이 원죄를 범할 때 범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했거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명렬에 반항하는 행동인 줄 알면서 행한 것으로 보았다. 이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미친 상처는 "인간 존재의 한 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 전체에까지 미쳤다." "머리에서 발꿈치까지 존재 전체가 사악의 홍수에 침몰되고 말았다." 고 그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말하고 있다.

(8). 예정론

이 교리는 철두철미하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사람과 그 은총에 참여치 못하는 사람에 관한 교리이다.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제정을 말한다. 이것으로써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것을 자기가 원하신대로 결정하셨다. 모든 것은 동일한 조건으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어떤이는 영생으로 예정되었고 어떤이는 영원한 파멸로 예정되었다.각자는 이 둘중의 한 편으로 창조되었다. 즉 생명으로나 그렇지 않으면 죽음으로 예정 되었다." 고 칼빈은 말한다. 칼빈은 영원 불변하신 계획으로써 하나님은 단 일회적으로 구원에 용납될 사람과 파멸로 저주 받을 사람들을 결정하셨다고 했다. 선택을 받은 사람에 관한한 이 계획은 사람의 공로와는 전혀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의 넓으신 은총에 의거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저주 받은 자들에게는 의롭고 공평하고 심원한 심판으로써 생명의 문이 닫아지고 말았다고 했다. 칼빈은 예정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소명을 선택의 증거로 생각한다. 동시에 의인을 그들이 영광에 도달할 때까지 선택을 나타내는 또 한가지의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칼빈에 의하면 성서에서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중예정이라고 했다.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택함을 받았다.(엡 1:4)"고 설명한 것은 선택이 성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잘 증명해 주는 것은 물론이며, 로마서 9장에서 바울도 똑같이 말하고 있다고 보았다. 9장 11절에서 13절까지를 보면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을 인용해서 두 계급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 하면서 이사야 53장 1절에 있는 말씀으로 예정론은 넉넉하게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칼빈에 의하면 예정론이나 이중 예정론은 성서에서 가장 정당한 교리로 보았다.




III. 결 론

그의 신학을 보면 신인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도 없고 가까이 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참된 신인식이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이 아닌 그의 영광도 알고 의뢰하고 찬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칼빈은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무오한 성령의 감동으로 된 말씀으로 보았고 이 성경에 의해 모든 것은 증명된다고 보았다. 칼빈의 개혁 운동은 그의 생존시에 이미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유그노(Hugnote) 운동이 칼빈의 사상을 받아들여 1552년 파리 대회에서 칼빈주의적 신조를 채택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칼빈주의자 브라이(Bray)에 의해 1561년 벨직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그의 제자에 의해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어 장로교 국가가 되었다. 영국 교회는 칼빈주의 영향 하에 '39개 신조'를 채택했고 곧 청교도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지역은 칼빈주의 일색으로 변하여 156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이 채택되었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 바젤, 베른 등이 칼빈주의를 따르게 되었다. 칼빈의 종교개혁은 루터와 함께 당시 만연해 있던 유럽의 종교 사회적 한계를 딪고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 서양 근대사회 진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IV. 참고문헌

1.E.S.MOYER,「인물중심의교회사」곽안전,심재원역.서울:기독교서회,1983.

2.W.S. BUSMA,「칼빈」이양호,박종숙역, 서울:도서출판 나단, 1991.

3.김재권,「존 칼빈의 생애와 업적」서울:생명의 말씀사, 1986.

4.이종성,「칼빈-그의생애와사상-」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68.

5.전경제,「칼빈의 생애와 그 신학사상」서울:신교출판사, 1965.

6.전경제,「칼빈의 생애와 신학사상」서울:한신대학 출판부, 1984.

7.정상운,「세계교회사」안양:성결교신학대학교, 1994.

8.정성구,「칼빈의 생애와 사상」서울:세종문화사, 1980.